위로의 시간, 눈물의 시간, 한 무덤, 나무 십자가, 땅에 꽂혀있는 몇개의 촛불들과 꽃들…. 사람은 흙에서 나왔으며, 흙으로 돌아간다. 여기 전쟁이 있고 그리고 죽음이 지배자가 되었다.
사라예보!
어머니는 무덤곁에 몸을 숙이고 아들을 그리며 슬피 운다. 상처는 그녀의 가슴속에 크게 남아 있다. 이런 무덤은 어디서나 볼수 있다. 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어머니들도 수없이 많다.
누가 그들을 팔에 안아 위로해 줄 것인가? 슬퍼하고 있는 사람은 얻어맞은 사람, 땅바닥에 유린된 사람이다. 슬픔에 잠긴 사람은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져 굴복하고 있는 사람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그 눈물에 떠내려 가버린다. 이 눈물들은 바다를 채울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바다위에 넘쳐 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슬픔중에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다. 눈물들은 고통을 쓸어낼 것이다. 기대어 마음껏 울어버릴수 있는 어깨를 얻은 슬픈 사람은 행복하다. 자기를 붙잡아줄 팔을 얻은 슬픈 사람도 행복하다. 애도의 시간은 위로를 찾아 소리 친다.
위로란 말에는 계약ㆍ동맹ㆍ충실의 뜻이 담겨져 있다. 다른 사람과 동맹을 맺으면 슬픔을 이겨낼수 있다. 고통은 서로 나누어 가질때 훨씬 가벼워진다. 이러한 동맹과 충실의 유일한 보증은 하느님이다. 그분은 충실하고, 믿을수 있고, 오래 지속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창세기 28, 15)
이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했다. 그분은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충실하신 말씀 그 자체이시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이 죽음까지도 견디어 낸다. 어느 고통도, 어느 죽음도 하느님의 입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은 항상 생명을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확실히, 죽음은 확실히 있다. 그리고 슬픔도 고통도 있다. 그러나 더이상 찌르는 가시는 없다. 위로와 사랑과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외지(外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