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녀는 웃고 있다.
그녀가 정말로 웃고 있는 것을 얼굴에서 알수 있다.
왜 웃음을 그렇게 중대시 하는가?
이 물음은 -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순절의 특성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왜 그런가? 여기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들여보자. 『너희는 단식 할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아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를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마태6,16~18)
웃음을 중대하게 여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단식은 좋은 것이다. 누가 이를 의심하겠는가? 그러나 누가 자기의 단식행위를 시장에 갖고 나와서 행상을 하고 다니면, 그는 단식의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빗나간 것이다.
도대체 주가 신심을 과시한다면 신심에 오히려 피해를 주게된다. 신앙을 공적으로 또 명백하게 고백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의 뿌리는 하느님과의 개인적 관계 안에 있어야 한다. 누가 자기의 신심을 밖으로 보여주려고만 한다면, 하나의 겉치레만 남게된다. 실제로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당하는 유혹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순히 외관보다 순수한 내면을 택하고, 밖으로 착한척 하기보다 실제로 착해져야 할 것이다. 웃음을 중대하게 여긴다. 기름바른 머리와 깨끗이 씻은 얼굴이 단식에 어울리는 얼굴이다.
우리는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웃어야 할 이유가 된다. 누가 미소를 잃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진정으로 웃고 있다면, 그는 구원 받은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우리의 온 삶이 달려 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 그리고 우리의 부활을 - 믿는 것이다.
<외지(外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