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사회도 이제 경쟁력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훌륭한 인적 자원을 양성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학문선택의 기회를 제고할 수 있어야죠. 두 대학의 통합은 바로 이러한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나아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꼭 이루어져야 할 과제였습니다.』
효성여대와 대구 가톨릭대의 통합으로 새롭게 출범한「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초대총장에 임명된 김경환 신부는 그간 논란과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합을 적극 추진하게 된 이유를 강조하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했다.
『일방적인 흡수라는 오해 때문에 반발도 있었고, 한때 계획이 백지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학교발전이라는 대명제를 놓고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데서 합의점을 찾은거지요』
「생존경쟁의 한계」에 대한 위기감과 가톨릭 이념에 입각한 보다 양질의 대학교육을 구현하려는 재단측의 강력한 의지가 통합의 가장 큰 동기였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2월 처음 공식 거론되기 시작한 두 대학의 통합 논의는 불과 1년 사이에 통합추진-무산-재추진-통합승인이라는 곡절을 겪었다.
94년 3월 12일 양 대학 총장및 교무처장 등 대학 관계자 10명으로 통합조정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통합방식과 절차 등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 양 대학의 통합은 급진전 되는듯 했다. 그러나 효성여대생들이 수업거부 및 학기말시험 연기 등 강한 반발을 보이자 재단측은『구성원 합의없인 통합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 통합은 사실상 무산됐었다.
이들 학교의 통합이 해를 넘기지 않고 급히 성사된 배경엔 95년 입시에서의 특차전형과 대학개방과 정원자율화, 98년 대학평가 등을 앞두고「이대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대학특차모집은 대학간, 학과간 우열을 확연히 구분해주는 전기가 되었으며, 약학계열 20명을 특차모집키로 했던 효성여대가 여자대학으로서의 한계를 다시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통합 마무리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교명선정 문제였습니다. 당초「대구가톨릭대」로 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대구효성가톨릭」대로 확정된 것만 봐도 그에 따른 진통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지요』
김신부는 그러나 사실상 통합을 위한 실질적인 작업은 지금부터라고 강조했다.
『그동안의 논의는 사실 겉테두리에 불과한 것이지요. 통합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 창학이념을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두 대학의 학생ㆍ교수진ㆍ직원 등 모든 사람들이 양보와 이해, 희생의 마음을 갖고 참여하고 노력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김신부는『각 대학이 쌓아온 위상과 전통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때 도태될 수 밖에 없다』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현실을 최대한 파악하고 난 후에 제도적 보완이나 개선 등 필요한 조처들을 취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구랍 30일 교육부의 승인을 받고 3월1일자로 명문 사학(私學)을 꿈꾸며 새롭게 출범한「대구효성가톨릭대」의 변화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효성여대가 설립 43년만에 여자대학의 간판을 내리고 남녀공학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과 공대(工大)의 신설.
아직 기획단계이긴 하지만 대학측은 제어계측과, 염색공학과와 1~2개의 첨단기술관련학과를 둔 공과대학을 시설하고 통계학과 경영정보학과 등 11개 학과의 야간강좌를 개설할 것으로 알려졌다. 공대가 신설되면 지역기업들과의 산학협동 및 연구체제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또 사범대학의 생물교육과와 화학교육과를 과학교육과로 통ㆍ폐합하고, 자연대에 생물과와 화학과를 신설하며 자연대의 식품가공학과를 공대의 식품공학과로 변경하고 자연대 전자계산과를 공대로 이전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대학은 오로지 전문기술인력 양성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새로 출범하는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는 가톨릭 교육이념 안에서 연구중심의 대학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국가 사회 이웃을 위해 일하고 봉사할줄 아는 인간을 길러내는 전인교육의 장이 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나갈 것입니다』
김신부는 특히『두 대학의 총장으로 계시던 분들이 새로운 총장과 함께 평교수로 재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면서 『가톨릭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이러한 사례가 앞으로 통합의 묘를 살리는데 본보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62년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로 서품된 김경환 신부는 재불(在佛) 한국 가톨릭학생 지도신부(63~68), 가톨릭시보사 주간(69~73), 가톨릭문화관장(74~75), 광주가톨릭대 교수(75~82), 대구대교구주교좌 계산본당 수석보좌(83~87), 매일신문사사장(89~92)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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