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알 라이스너 신부는 다카우의 집단 수용소에서 그의 첫 미사이자 마지막 미사를 거행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6월23일 독일 베를린을 방문할 때 그를 시복할 예정이다.
1915년 2월28일 독일 니더라인 레스에서 출생, 클레베에서 성장한 라이스너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가톨릭 청년회에 가입, 젊은이들과 함께 신심활동을 하고 특히 미사전례에 열심히 참석했다.
1934년 고등학교 졸업 후 사제가 되고자 결심한 라이스너는 교구 청년회장직을 역임하며 나치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했다.
1939년 3월25일 부제품을 받은 라이스너는 몇 달 후 서품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1939년 와병 중에 게슈타포에 체포돼 사제서품을 받지 못했다.
1940년 말 나치의 힘러는 수용된 모든 신부들을 다카우에 모아 수용했다.
라이스너 부제는 12월8일 이곳으로 수용되어 온갖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처음에 그는 밭일을 했으나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병세는 더욱 깊어만 갔다.
결국 라이스너 부제는 1941년 3월 쓰러져 폐에서 피를 쏟았으며 수용소의 병동으로 옮겨져 종전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희망도 보이지 않았지만 사제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육신의 고통 가운데 동료 수감자들을 도와주고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던 성체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사목자로서 위로자로서 활동을 했다.
저녁이면 그는 수감자들과 함께 청년회의 노래를 부르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고자 했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동료들에게 많은 감화를 불러 일으켰고 고통을 인내하는 활력소가 됐다.
수용소에 수감된 프랑스 출신 가브리엘 피게 주교는 라이스너 부제에게 비밀리에 사제서품을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1944년 12월17일 위험을 무릅쓰고 서품식을 거행했다.
육신이 쇠잔해진 라이스너 신부는 12월26일 처음이자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으나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1945년 4월29일 다카우 집단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환자들은 아직 수용소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라이스너 신부의 친구들은 그를 수용소에서 꺼내 뮌헨 근처의 요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병은 마지막 단계에 와 있었으며 1945년 8월12일 젊은 라이스너 신부는 선종하고 말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