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아침 햇살에 부푼 강원도 정선읍은 여느 날과 달리 부산한 움직임에 들떠 있었다.
『성당에서 1백세 된 조대영(로렌조) 할아버지 백살 잔치와 함께 경로잔치를 개최하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모두 11시까지 성당으로 모여 주십시요』라며 동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에 정선 읍민들은 마치 큰 경사라도 난 듯 술렁댔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경로당에서 또 농사일을 채비하던 촌로들이 하나둘씩 모이는가 싶더니 호기심 많은 동네 아낙들과 장년들이 1백살 생일을 맞은 주인공을 보기 위해 성당에 발을 디뎌 놓았다.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주인공 조대영 로렌조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성당에 모여 있던 촌로들이 조금씩 웅성댈 때 정선병원에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던 박흥준 신부가 어두운 얼굴로 나타나 김영진 주임신부에게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생일잔치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신부는 『어제 성모회 회원들이 오늘 입혀 드릴 새로 지은 한복을 가져다 드렸더니 입어 보고선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어린애처럼 좋아했고 내일 잔치에 꼭 갈 테니 고무신을 닦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며 『아마 너무 흥분해 쇼크를 일으킨 것 같다』고 전했다.
생일 축하미사까지 준비해 놓은 김연진 신부는 이 말을 듣곤 풀이 죽어 성당에 모인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조대영 할아버지의 조속한 건강 회복을 기도하고 주인 없는 잔치를 열었다.
이날 조대영 할아버지의 백살 잔치는 13년 전 이미 준비돼 있던 일이었다. 당시 사북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김영진 신부는 87세로 남면공소 회장으로 있던 조대영 할아버지를 만나 『1백살까지 살아 계셔서 제가 차려 드리는 생일상을 꼭 받으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으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청년기를 보내다 해방 후 남하했다 한국 동란으로 인해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조대영 할아버지는 강원도 사북 땅에서 평생 양봉을 하면서 살아왔다.
재혼을 했으나 일찍 아내를 여윈 조대영 할아버지는 딸 조영자(마리아ㆍ55)와 함께 99살까지 벌을 치며 외로이 살았다.
조대영 할아버지는 지난해 3월 늑막이 와 정선병원에 입원하고부터 지금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조 할아버지는 1백살 생일잔치를 차려 주겠다는 김영진 신부의 말을 굳게 믿고 만나는 사람마다 『신부가 아들 노릇을 해 1백살 생일상을 주기로 했다』며 자랑을 했다.
13년간 고이 지켜왔던 약속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조 할아버지는 너무 감격해 쇼크를 받은 것이었다.
오후 1시경 할아버지가 의식을 조금 회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김 신부는 할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빨리 건강을 회복해 신부 아들이 드리는 생일상을 받으십시요』하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대영 할아버지도 희미한 의식 속에서 김 신부를 알아보고 가쁜 목소리로 『오늘 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혀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13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으로 되만난 사제와 한 촌로의 감동 어린 재회는 우리 시대에 「사랑」과 「신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케 하는 화두를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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