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묻는다.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요?”
도시 아이가 대답한다. “물이 됩니다.”
산골 아이가 대답한다. “봄이 됩니다.”
박기호 신부(예수살이공동체 대표)의「산 위의 신부님」(324쪽/1만3000원/한겨레출판)에 나오는 이야기다. 박기호 신부가 서울을 떠나 소백산 자락 충북 단양 ‘산 위의 마을’에 도착한 것은 5년 전인 2006년이다.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사제의 상징인 사제복과 로만 칼라는 옷장 깊숙이 넣어 두고 고무신과 작업복, 산동네의 추운 겨울에 대비해 두꺼운 파카를 챙겨 5박6일을 걸었다.
박 신부가 건설한 산 위의 마을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였다. 홍수로 모든 생명체가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일이 현대에 또 일어날지 모르지만 박 신부는 우리 시대의 ‘홍수’인 물신과 소비문화가 지배하는 도시를 떠났다. 서울 생활 40여 년만이다.
박 신부는 ‘산 위의 마을’ 모토를 사도행전적 공동체의 모습에서 찾았다. 가진 것을 모두 내 놓았더니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공유의 원리’에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을 선언하시며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고 하셨고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다.
박 신부는 예수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믿었고 산 위에 노아의 방주를 띄웠다. ‘산 위의 신부님’을 따르는 이들이 나타나 방주의 문을 열어젖히기 시작했고 30여 명의 산 위의 마을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호미 한 번, 쟁기 한 번 다뤄 본 적 없는 도시인들이 90세 노인부터 갓 태어난 아기까지 자기 몫의 밥벌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공동체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박 신부가 건설한 산 위의 마을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고 발로 뛰어야 하는 ‘삶’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농사가 잘 됐다고 기뻐하다가 바로 이듬해에는 폭삭 망치기도 하고 송아지를 잘못 매입해 수백만 원의 손해를 보는가 하면 소들이 초보 농부를 얕잡아 보고 말을 듣지 않기도 했다.
도시를 탈출했던 이들 중 ‘이탈자’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산 위의 마을에 적응하고 살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신부는 실망하지 않았다. 박 신부는 “그들은 도시로 돌아갔지만 결코 이전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며 “산 위의 마을은 새 삶의 희망을 찾는 이들로 더욱 북적대리라 믿는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박 신부는 봄이 와서 농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움직이면 농부를 위해 봄이 온다는 사실을 몸소 농사를 지으며 알게 됐다고 고백한다. 하느님이 사람만을 당신의 모상으로 만들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시고 세상 피조물을 지배하라고 한 참뜻이 산 위의 마을에서 실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신부는 「산 위의 신부님」을 산 위의 마을에서 태어난 첫 아기인 김자연(여)의 ‘출생기념’ 작품이라고 말했다. 자연이를 위해 일회용 기저귀도, 출산 축하금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산 위의 마을 공동체는 ‘가짐없는 부자’의 방식으로 자연이의 탄생을 기뻐했다. 박 신부는 자연이에게 “경쟁하거나 영성이 없는 직업은 불행하다. 산 위의 마을의 향기로운 꽃이 되어라”라고 축복했다. 박 신부는 자연이를 희망의 징조라 여기고 산 위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 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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