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하느님이 시키시는대로 일했을 뿐입니다. 제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모든 이들이 도와준 덕분입니다』
이역만리 한국땅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고아들과 결핵환자들을 위해 4반세기동안 자신을 불살라온 벽안의 하마리아 여사(54세ㆍ오스트리아인).
지난 59년 이 땅에 첫발을 디딘지 25년을 맞는 하마리아 여사의 한국 진출 은경축 축하미사가 9월 21일 마산 양덕동성당에서 장병화 주교와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조촐하게 봉헌됐다.
『2차대전으로 폐허가 된 오스트리아는 다른 나라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게 됐지요. 그때 받은 도움에 보답하는 뜻으로 더 어려운 나라와 고통받는 국민들과 사랑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6ㆍ25로 어려움을겪고 있는 한국에 찾아오게 됐나 봅니다』
1959년 12월 8일 한국에 온 하마리아 여사는1년간 대구 효성여대에서 독일어강사로 재직하며 한국말을 익힌 후 당시 구두닦이 소년 16명을 모아 숙식을 같이하며 이 땅의 불우한 이들과 함께하는 봉사와 희생의 생활을 시작했으며 64년 대구검사동에 한국 최초로 SOS어린이 마을을 설립、4년동안 이들의 뒷바라지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68년 마산으로 내려가 마산 국립 결핵요양원에서 원목활동을 시작한 하마리아 여사는 75년까지 그곳에서 결핵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 불철주야로 뛰었다.
오지리 부인회의 도움을 얻어 75년 진영에 진영성모의원 별관을 건립、오늘까지 갈곳 없고 노동력 없는 결핵환자들을 무료로 돌보고 있는 하마리아 여사는 또 이들을 돕는 후원회인「도움회」를 만들어 사랑의 손길펴기를 계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을뿐 아니라 경남 고성에 있는 결핵 치유자들의 자활촌인「예수의 작은 마을」을 위해서도 봉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가포시절(마산 국립요양원)이 제일 어려운 때였읍니다. 방을 얻어 퇴원 환자들을 모아 돌보려고 하니 이웃의 반대가 심했읍니다』
당시 환자들에게 약과 음식을 마련해 주려고 차비까지 아끼며 걸어다닌 적이 많았다고 털어놓는 하마리아 여사는『그래도 마음은 항상 기뻤다』고 덧붙였다.
76년 석전동에 가톨릭 여성회관을 건립했으며 또 반송본당 부지를 확보、창원지역에 꼭 성당이 들어서야 할 곳에 성전을 지을수 있도록 하는 등 교구에서 필요한 일이고 자신한테 주어진 일이면 어떤 어려운 일도 마다않는 하마리아 여사는 77년 5ㆍ16민족상 사회부문 장려상을 수상했으며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는「골드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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