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계의 운로이며 수학계의 선구자인 석봉 오용진(요한) 선생은 학자이며 교육자로,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의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나라 수학계에 주춧돌을 마련하고 교육에 몸바친지 40여 년, 석봉선생이 길러낸 인재는 우리나라 정치계ㆍ경제계ㆍ교육계에서 수천명을 헤아린다.
나라를 키워갈 재목을 키우면서 이 땅을 하느님왕국으로 성화시켜갈 사제들의 양성후원에도 힘을 기울였던 석봉선생은 격동기였던 1906년 4월 18일 신앙심이 돈독한 성가정에서 부친 오성기씨와 모친 정계남 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육만이 이 민족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석봉선생은 26년 대구고보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 32년「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곧바로 모교인 대구고보 교유, 경북종교장을 거치면서 한대에 교육자로 봉사하기보다 2대ㆍ3대를 키워갈 교사양성에 더 큰뜻을 두고 48년 현 경북대 전신인 대구사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25년 당시 대구 내 천주교신자며 선도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젊은이들 여섯사람과 뜻을 모아「友六會」를 만들어 전교와 문맹부녀자교육 등에도 큰 힘을 쏟았다.
이효상ㆍ최재복ㆍ김주석ㆍ서정섭ㆍ김용화 선생과 같이 우륙회회원으로서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전신)를 창간, 1940년까지 펴냈던 선봉선생은 우륙회를 통해 이 나라의 어둠을 밝혔으며 일본유학시절에는 방학을 이용, 전국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드물었던 한국인교사로서, 또한 천주교신자로서, 교육에 충실하면서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석봉선생은 해방후인 49년 대건인쇄소를 운영, 천주교회보 발행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65년부터 신학생돕기 후원회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 75년부터 79년까지 교구 초대사제양성후원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내의 공로를 기려 74년 교황청이 주는 평신도사도직 수훈포상을 받은 석봉선생은 71년 경북대를 정년퇴임하기까지 이나라 교육에 끼친 다대한 공로로 70년 12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치밀하고 차분하면서도 조직력과 판단력이 뛰어났던 석봉선생은 이나라 수학연구와 교육일선에서 묵묵히 초석을 다졌다.
후배와 후학을 남달리 아끼고 사랑한 석봉선생은 경북중ㆍ고 동창회부회장직을 맡아 일할 당시 회장이며 절친한 죽마고우인 한솔 이효상 선생과 더불어 장학금을 모으기 위해 열성을 다하기도 했다.
가톨릭정신에 입각, 철저한 신앙인답게 한평생을 살다간 석봉선생은 결코 사랑을 겉으로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가족ㆍ친지들은 말한다.
과묵하나 자애로운 스승이었다고 학문에서는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일면도 지닌 스승으로서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마음으로 키워줬던 석봉선생은 경북대 초대대학원장ㆍ대한수학회 부회장ㆍ경북중고동창회장등을 역임했고 69년 경북대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서태경(요한나) 여사와 5남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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