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평신도 사도직협의회(회장ㆍ엄익채)가 이시대의 갈망, 육화한 예수그리스도를 찾아 포상함으로써 그 사랑의 빛을 이 시대의 모든이에게 확산코자 펼친「가톨릭대상」은 사회저변에서 결코 드러나지 않은채 찬란한 빛을 발하던「숨은 보석」을 찾아내는쾌거를 안은것이다. 金水蓮씨. (체칠리아ㆍ51세ㆍ도봉구 미아1동 8백39번지)그녀는 분명 자기를버리고 죽음으로써 구원의 등불을 높이 치켜든 사랑의 파수꾼,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한국평협이「가톨릭대상사랑부문」첫 수상자로 선정발표한 김수련씨는 찢어질듯한 가난과 역경의 굴레를 사랑으로 다스려 주위를 밝혀온 고독과 양심의 대변자라 말할수있다. 도봉구 미아1동, 속칭「빨래골」로 불리는 비논속에 있는그녀의 집을보면 그가 30여년 간 행한 사랑의 행적이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것인가 충격처럼 가슴에와 닿는다.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의 판자촌 빈촌지대. 옹기종기 둘러앉은 판자촌안에서 훈훈한 인정과 뜨거운 사랑이 샘솟아 매서운 겨울바람을 잠자게 해왔다는 사실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너무나 부끄러워 할말이없습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했다고 이처럼 큰 상을 받는지 얼떨떨할 뿐입니다』굵게 주름진이마, 반백의 머리가 각고의 나날을 말해주고 있지만 나직하게 울려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대상을 받는 기쁨에앞서 결코 자격이 없다는 진정한 겸손이 하나가득 담겨 있었다. 조용한 실천으로 달동네의 등불이 되어온 그녀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시켜 표현할 수는 도무지없다. 그러나 가난의 굴레속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해온 50평생은 생각과 말보다는 행동이 앞선 실천적 삶의표본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만큼 그녀는 없는 가운데서도 풍요함을 자아내는 사랑의 마술사로 주위를밝히며 살아왔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살아갈 뿐』이라며 송구스런 마음을 여전히 버리지 않는 김수련씨가 가톨릭에서 마련한 대상의 첫 수상자가 된 것은 하나를 받으면 열을 나누는 박애정신에서부터 그뿌리를 찾아야한다는 것이 그녀를 아는 주위의 한결 같은 평이다. 무허가 자촌의「없는 설움」을 따뜻한 마음으로 메꾸어가며 사랑을심는 김여사의 삶은 결코 풍요한 가운데의 나눔이 아니라 두벌속옷을 필요한 이에게 서슴없이 주는, 살아있는 실천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라 말할수있다.
현재 살고있는「빨래골」에서 김 여사를 모르는 사랑은 드물다. 총총히 박혀있는 판사촌 구석구석까지 그의 사랑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형편속에서도 이웃의 딱한 사정을 보고만있 지못하는 성품으로 끼니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선 따뜻한 방을, 약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약을, 위로가 필요한 이웃에게는 사랑의 마음을 한없이 주어왔다.
그 같은 사랑의 행로는 춥고 삭막하기만한 빨래골에 훈풍을 몰아왔다. 무한히 베풀면서도 결코 내세우지 않는 소박하고 겸허한 삶의 자세가 가난에 찌든 마음과 마음속에 사랑의 불을 놓은 것이다.
주고 베푸는 것이 타고난 성품 같은 김 여사에겐 나눔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간직하게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이었다. 30여 년 전 상이용사인 남편과 올망졸망한 세아이를 이끌고 만삭의 몸으로 행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김수련씨는 사흘을 굶고는 궁여책으로 인근 도립동성당을 찾아갔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내린 마지막 용단이었다. 딱한 사정을 듣고 난 당시 주임 서 요셉 신부는 어떠한 곤경속에서도 용기를 잃지말라는 진정어린 위로와 함께 밀가루 반포대를 내주었다.
『밀가루와 따뜻한 위로는 우리가족을 죽음의 구덩이에서 살려낸 생명의 빵이었어요. 생명이 다하는날까지 그 사랑은 결코 잊지못할 것입니다』절박했던 그때를 회상하는 김 여사의 눈가에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아무리 조그만 도움이라도 없는 사람에게는 하늘만큼 큰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으로 터득한 그 당시부터 김 여사는 가난속에서 도움에 밴 애덕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사실 김 여사의 50평생을 돌아보면 행복과 기쁨의 시간보다는 교통과 고난의 시간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수있다.
1932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김수련씨는 5세때 부친을 잃고 16세때 어머니마저 잃는 불행속에서도 언니(김금련씨)집에서 비교적 안정된 처녀시절을 보냈다. 20세된던 1950년 4월 신용대씨(마태오)와 결혼, 신혼살림이 자리도 잡기전 6ㆍ25사변을 맞아야 했다. 순경이던 남편은 스스로 군에입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등에 참가, 용감히 싸웠으나 작전도중적 포탄에 맞아 왼쪽눈과 왼쪽팔을 잃는 큰부상을 당한뒤 오랜 투병끝에 상이제대했다.
영등포 도립동 철로변에 천막을 치고 껌장사ㆍ연필장사ㆍ노동ㆍ남의집살이 등 사회밑바닥을 헤치며 억척을 부렸으나 남편의 주벽과 배고픔은 늘어가기만했다.
『사는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비참한 생활이었다』고 당시를 말하는 김 여사는 넷째아이를 가져 만삭이되면서 상황은 더욱 핍박해졌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찾은곳이 도림동성당. 밀가루와 따뜻한 위로로 재출발을 다짐한 김 여사는 해산 하루만에 신부님이 주신 밀가루로 풀빵을 만들어 행상에 나섰다. 해산후 조리는 고사하고 따끈한 미역국조차 못먹은 몸을 이끌고 시작한 행상이었지만 이웃이있다는 사실은 무한한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고달픈 나날을 쪼개 열심히 교리를 배워 69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축복을 받기도했다 장사가 잘돼 조금씩 저축한 돈 1만6천 원으로 전세방을 얻어 연탄불을 지피고는 온가족이 한없이 울었다. 조그만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께 감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행복도 잠시, 집은 도시계획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철거되고 말았다.
정룡 판자촌으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고난의 삶은 남편이 73년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기쁨으로 승화됐다. 이무렵 원호법이 제정되자 남편은 1급 상이용사로 원호금을 받게되는 등 조그만 행복이 이어졌다.
조금 나아진 형편에 감사하면서 김수련씨는 쌀과 옷을 들고 이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던일이 실패하는 등 또다시 시련이 닥쳐 가족들은 성남시 단대동으로 또 수유리로 보금자리를 옮겨 다녀야했다. 말할 수 없이 가난한 현실속에서도 김 여사는 장위동 단대동 삼양동성당 등 이사가는 곳마다 성당 신축에 앞장서 헌금, 주위를 놀라게했다.
약속한 신입금을 마련키위해 온갖 행상에 나서 모은 돈은 고이 간직해 신축비로 헌금하는 그녀의 정성은 그보다 훨씬 형편이 나은 이웃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산후조리 부족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행상을 버리고 다시 풀빵장사에 나선 김 여사는 기어이 약속한 신입금을 봉헌, 한사람의 신앙인으로 의무를 다하는 놀라운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부족하기만한「빨래골」의 생활속에서도 이웃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그침이 없었다. 냉담자 방문을 비롯, 식량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신의 식량을 아낌없이 나누고 병고로 신음하는 이웃에게는 기도와 약으로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그녀의 사랑은 남편 신용대씨의 한결 같은 뒷받침이 다시없는 힘이되었다. 생활비를 아껴 수시로 바환자촌ㆍ고아원ㆍ양로원을 찾는 김여사는 생활자체가 하나의 신앙이라고 그를 아는 이들은 입을 모은다.
김수련씨가 가톨릭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느 사실을 듣고「빨래골」을 찾았을때 그곳의 모든 주민들은 너무도 당연한 포상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오히려 현재 드러난 부분이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녀를 겪은 미아3동 여형구 신부와 현재 소속본당인 미아5동의 김종국 신부도『김 여사는 가난이 사랑실천의 장애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말끔히 씻어준 장본인』이라면서『김 여사의 수상은 참으로 기쁘고도 자랑스러운일』이라고 감격해했다.
현재 도배일을 하고있는 남편과 훌륭히 자란 자녀들과 성가정을 이루며 살고있는 김수련씨는 역경을 딛고 일어나 이웃과 사회를 밝혀온 이 시대의 등불임에 틀림없다. 건강으로 풀빵장사를 그만둔 지금도 풀빵들을 가보처럼 간직하고있는 그녀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남은 여생도 이웃과 함께 할것을 다짐하며 샛별처럼 살고있다. 오늘도 조그만 사랑을 함께할 이웃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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