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외롭다. 그리고 험난하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 외롭고 험난한 그리스도의 길을 50년간 걸어온 서울대교구 임종국ㆍ오기선 두 신부가 11월 17일 사제 서품 금경축을 맞았다. 격동기에 태어나 나라잃은 설움, 전쟁의 와중등 이 민족의 아픔을 모조리 겪으면서도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사제의 길을 걸어온 임종국ㆍ오기선 신부의 금경축 축하 행사는 11월 17일 명동 대성당에서 2 천여 신자들의 축하 속에 베풀어졌다. 말없이 꿋꿋하게 걸어온 노사제들의 삶을 통해 십자가의 길을 영광의 길로 승화시켜 오늘에 이른 50년 사제의 길을 되돌아본다.
◆林鍾國 신부
철저와 충실을 基本바탕에 둬
隱退後 조용한 삶…온화한 牧者모습 지켜와
2미터에 가까운 키ㆍ1백50킬로그램에 달하는 몸무게로 당당한 체구를 가졌던 임종국 신부(76세ㆍ서울 동대문구 용두 2동 102의 119)는 대신학교 시절 군계일학의 모습으로 키 작은 한국인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 주었던 장본인.
76세의 고령에다 오랜 병고를 치르면서 당시의 풍채는 조금 잃었지만 여전히 우람한 체구로 좌중을 압도하는 임 신부는 당당한 외모만큼이나 과묵하고 철저한 생활로 50년 사제의길을 걸어왔다.
혼돈을 거듭 하던 격동기에 태어난 임 신부는 이 나라 이 민족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가시밭길을 사제로서, 한 인간으로서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달려와 오늘에 이른 모범적 삶의 표본이라 말할수 있다. 다시말해 임 신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수있는 50개 성상을 오로지 사제로서 사제답게 꾸준히 외길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1906년 서울에서 열심한 신앙가정에서 출생한 임 신부는 32년 성심대학교를 졸업, 사제로 서품됐다. 이듬해 황해도 장연 교회 주임으로 시작된 임 신부의 사제생활은 35년 인천교구 답동 주임으로 이어져 그로부터 23년간 인천 답동본당에서만 사목활동에 전면, 현세적으로 무 의미하게 여겨지는, 그러나 결국 승리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왔다.
또한 철저와 충실을 기본 바탕에 둔 임 신부의 교과서적 사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자의 표양을 후배 신부들에게 깊이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답동시절 일제 말리 이 민족이 함께한 시련은 임 신부에게도 닥쳐왔다. 답동성당을 선전 영화관으로 쓰겟다는 억지였다.
그들의 억지가 성당 중앙을 버티고 있는 기둥 때문에 좌절되자 쾌재를 불렀던 임신부는 막문 국민학교를 헐고 다른 학교와 합쳐야하는 연이은 비극에 목놓아 울어야했다.
수많은 한국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정기를 불어 넣어주던 박문학교가 44년 5월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고별식을 갖던날 복받쳐 오르는 슬픔과 눈물로 고별사 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던 당시의 뼈아픈 순간을 임 신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성당 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전긍긍 애쓰던 일도 나라 잃은 설음 속에 겪을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그러나 생생히 살아나는 기억들이다.
59년 다시 고향 서울교구로 돌아온 임 신부는 천호동 주임, 62년 교구 재경부장, 63년 다시 천호동 주임을 거쳐 68년 은퇴하기까지 조용함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산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보냈다.
은퇴 후 조용한 삶으로 돌아간 임 신부는 건강 때문에 고통속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웃을을 잃지 않는 온화한 목자로 또 착한 목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의 모습을 지켜왔으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세로 후배들을 이끌어왔다.
불편한 몸으로 이날 금경축 행사에 참석한 임 신부는 답사를 통해 50년 사제생활에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후회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라면서 그러나 남은 사제의 길이 보다 값진 삶이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역시 사제』라는 감탄을 지아내게했다.
◆吳基先 신부
敎會史家로 더유명…史料수집ㆍ발굴에 힘써
의욕적ㆍ정열적 자세로 생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 노기남 대주교 윤공희 대주교 두봉ㆍ김남수ㆍ경감룡 주교와 사계단 1백여명이 공동집전하는 축하미사로 시작, 축하식 축하연으로 이어진 자신의 금경축행사를 너무나 죄송하게 생각하면서도『고맙지뭐유』로 표현하는 오기선 신부(75세ㆍ서울 마포구 합정동 167의 28).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고맙지뭐유』속에는 오 신부 특유의 밝고 건강한 삶의 자세가 물씬 풍긴다.
75세라는 나이가 자칫 잘못 계산된 것으로 착각할 만큼 오신부는 사실 너무 젊게 산다.
젊은만큼 은퇴이후의 사제생활을 의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인 자세로 살아 주위를 놀라게 하고있다.
언제부터인가 오 신부는 교회사가로 더 잘 알려져있다. 수대째 내려오는 순교자 집안의 후손답게 이 땅 곳 곳에 산재해있는 순교지, 유적지, 성지등에는 오 신부의 발길이 닿지않은 곳이 없다. 끊임없이 샘솟는 정열과 특별한 애정으로 교회사로 수집과 발굴에 바치고 있는 노사제의 삶은 그래서 더욱 많은 이 들에게 값지고 귀하게 느껴지고 있는지 모른다.
71년 은퇴전까지의 사제생활도 오 신부에겐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 중 에서도 일제 말기 일본의 식민 정책의 하나로 치르어질 뻔 했던 사건 - 서울교구장을 일본인 주교로 세울계획을 무산 시켜 버린 공적(?)은 한국 근대교회사를 이야기할때 결코 빼놓을수 없는 사건으로 꼽을수 있다. 당시교구장 라리보 원주교 특사로 일본에 간 오 신부는『이미 일본인 주교로 확정되었다』는 바오로마렐라 주일 교화 대사의 말에『그렇다면 한국사제 60명이 모두 옷을 벗겠다』고 응수, 결국 한국인 최초 주교인 노기남 주교를 탄생케한 것이다.
1907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오 신부는 신심깊은 집안이면 의례 그러하듯 아무런 망설임없이 신학교에 입학, 32년 사제로 서품됐다. 33년 중림동 교회 보좌로 사제생활을 시작, 혜화동 주임을 거쳐 42년 교구장 비서 신의주 본당 주임, 신의주 성심학교 교장, 44년 안주 본당 주임, 안주 성모학교 교장등을 역임한 오 신부는 본당사목 외에 교육사업에도 주력, 남달리 뜨거운 열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44년 대흥동 본당 주임으로 대전 땅을 밟은 오 신부는 그로부터 20년간 방송출연ㆍ신문기고ㆍ사회사업등 교회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든지 달려가 사회 속에 교회를 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불같은 정열과 해박한 지식으로 오 신부는 대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의 유명인으로서 인간문화재라는 애칭이 붙여지기도 했다.
오 신부는 흔히 자신의 40년의 삶은「덤인생」으로 표현한다. 거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배경이있다. 49년 대전에서 고아원을 돕기 위해 장작을 구하러 나섰던 오 신부는 산길에서 80m 아래로 자동차가 구르는 사고를 당했다. 그런데도 그는 상처하나 입지않고 거뜬히 살아난 것이다. 그 때부터 덤인생으로 새롭게 태어난 오 신부는 성모님에 대한 놀라운 신앙심으로 사제의 길을 걸어왔다.
오 신부는 71년 은퇴,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한국교회 산중인으로 순교 복자들의 영광의 빛이 이 땅 전역을 물들이도록 뛰고 또 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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