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수 몬시뇰
46년간 본당사목에 헌신
투철한 교회정신, 덕성 지닌 사제로 알려져
이기수 몬시뇰은 1926년 사제로 서품된 후 첫 임지인 전라도 부안본당을 필두로 1962년 칠성동본당 (現 고성동)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기까지 46년간을 오로지 본당사목에 몸바쳐왔다. 반세기간의 사목생활동안 거친 본당수만 40여 곳에 이른다.
서품 당시는 아직 전주교구가 설립되기 이전으로 대구교구가 한창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초창기였다. 이러한 때 이 몬시뇰은 영ㆍ호남지방 각지의 본당을 두루 다니며 일선사목자로서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교회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그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사목활동은 교구설정 70주년을 맞은 대구교구가 내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
금년 84세로 교구내 한국인 성직자로는 박재수 신부와 함께 최고령자의 한사람인 이 몬시뇰은 뭣보다 투철한 교회정신과 뛰어난 덕성을 지닌 본당사제들의 모범으로 널리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농담까지도 조심해야할만큼 매사에 가식이나 사심이 없고 한결같은 동심은 그를 대해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느끼는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그의 이 같은 성품에 얽힌 사목상의 수많은 화제는 그가 얼마나 참되고 충실한 사제로서 살아왔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대구 비산동본당 주임시절 재의 수요일에 있은 일은 그의 철저한 교회정신과 꾸밈없는 순직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원래 라띤어 예식서에 따르면 재는 반드시 머리털에 뿌리도록 돼있었다.
그런데 이날 흰고깔을 쓴 수녀들이 제일 먼저 재를 받으러 나왔으나 아무리 살펴봐도 앞머리털은 찾을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생각다 못해 머리를 푹 숙이게 해 뒷머리털을 발견하자 그곳에 모두 재를 뿌려주었다고 한다.
경남 밀양군 산례면 부농집안에서 1899년 12월 23일 출생한 이 몬시뇰은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좋아해 사제가 된 이후에도 어느 곳에 부임하든지 성당내에 밭을 일구어 곡식이나 채소 등을 가꾸며 일속에서 생활해왔다고 한다.
바로 이 농사일 덕에 84세의 고령에도 아랑곳없이 오늘도 기성동공소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그곳 신자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명우 몬시뇰
교구행정 업무 등에 투신
탁월한 대인관계 등은 교회발전의 밑거름
이명우몬시뇰은 본당사목ㆍ청소년교육사업 그리고 교구행정사목을 두루 맡아 교구의 다양한 발전을 촉진시킨, 다재다능하며 특히 대인관계가 출중한 사제로 잘 알려져 있다.
1935년 대구 성유스띠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 이몬시뇰은 첫 부임지인 경남옥포본당을 시작으로 본당사목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로부터 8년간 본당사목을 통해 사제로서의 역량과 기반을 다진 李몬시뇰은 1943년 뛰어난 일본어실력과 사제로서의 폭넓은 대인관계 등을 인정받아 당시 일본인 교구장 하야사까 주교의 비서로 발탁돼 처음으로 교구에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 당시는 일본식민치하로 교회가 여러 가지 제약과 압력을 받으며 활동이 부자유스럽고 어려운 때였다. 이러한 때 일본인 주교의 비서로서 이몬시뇰은 교회의 궂은일들을 도맡아 처리해야만했다.
그중에서도 대동아전쟁말기에 일제가 전국성당의 종(鐘)들을 징발해가려할 때 일본헌병들과 맞서 성당의 종들을 지킨 그의 용기는 잊혀지지 않고 있다. 특히 마산 완월동성당의 종을 지키려 기차로 내려가던 중 삼랑진역 풀렛흠에서 왜경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몸이 쇠약해진 것은 그가 일찍 은퇴를 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왜관본당 주임신부 시절이었던 1946년 좌익게릴라들에 의한 10ㆍ1사건 때는 적탄에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진정되자 평소 무엇보다 청소년교육이 중요하고 시급함을 절실히 느껴온 이몬시뇰은 왜관에 순심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후 다시 부산중암ㆍ영천ㆍ대구삼덕동 등지의 본당일선에서 신자들을 사목한 그는 1962년 대구대교구 부주교로 임명돼 또 다시 교구에 들어가 10년간 총대리로 교구행정업무에 투신했다.
이몬시뇰이 본당을 맡고 있던 곳을 후임자로 부임하면 그 지역민들의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대단히 좋은 것을 바로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남다른 사교성과 뛰어난 인간관계는 교회발전의 밑거름이 돼왔다. 평소 몸이 쇠약하고 고혈압 등이 겹쳐 조기 은퇴한 이몬시뇰은 현재 대명동 사택에서 요양생활을 하고 있다.
◆전석재 몬시뇰
여성 인재양성에 전력
효대ㆍ효성여중고등설립-교육사업에 전념
지난해 대구대교구에는 3명의 몬시뇰(고위성직자)이 한꺼번에 탄생됐다. 몬시뇰의 임명은 교구설정 70주년을 맞아 그동안 교구발전에 크게 기여해온 원로사제들의 공적을 치하, 격려하는 것이었다. 본당사제로서, 교구행정업무를 담당한 사제로서, 그리고 교육사업을 전담해온 사제로서의 이기수, 이명우, 전석재 3명몬시뇰의 발자취를 간추려보기로 한다.
전석재 몬시뇰은 사제로서의 일생을 특수사목분야인 교육사업, 특히 여성교육에 몸바쳐오고 있다.
전몬시뇰은 대건중학교와 효성여자중ㆍ고등학교의 설립자이며 동시에 초대교장으로서 청소년교육의 초석을 다졌을 뿐 아니라 효성여자대학을 설립, 30년이 지난 오늘날 효대를 종합대학교로서, 한강이남에서는 제일가는 전국유수의 여성교육의 전당으로 위치를 굳히는데 자신의 전부를 바쳐왔다.
1942년 3월 서울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과동시 사제로 서품된 전몬시뇰은 1948년부터 1년간 대구삼덕동본당 주임신부로 잠시 본당사목을 맡은 외에는 오로지 교육사업에만 전념해왔다.
1952년 5월 현재의 효성여중자리에서 남산동성당 건물을 이양받아 문학 가정 음악 등 3개 학교 1백50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던 효성여대는 개교 28년 만인 1980년 10월부로 종합대학교로 승격돼 6개단대 35개학과에 매년2천명이 넘는(모집정원 2천20명, 졸업정원 1천5백50명) 신입생들을 받아 교육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지난해 2월 제26회의 학사학위 수여식까지 총 6천8백10명의 학사와 제8회의 석사학위수여식을 통해 1백68명의 석사 등 수많은 여성인재를 배출해냈다.
그리고 또한 단계의 비약을 위해 이미 하양읍금락동 산30번지일대 25만평의 신규교지를 확보해놓고 늦어도 10년 이내에 학교를 완전이 전할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처럼 효대가 거대한 이 땅 여성교육의 명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전몬시뇰의 가올리시즘에 입각한 여성교육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행동원리가 그 밑바탕이 돼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자신을 아낌없이 바친 그의 피와 땀은 학교의 나무 한그루 벽돌 한장한장에 그대로 서려있다.
전몬시뇰은 일반 대학들이 재단분규나 헤게모니장악을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이며 소란할때 더욱 학교의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한때는 「일인독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여성교육에 대한 집념과 생활철학은 비난을 협력과 깊은 존경심으로 바뀌게 했으며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나 온 효대가 더욱 힘차게 뻗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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