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91세를 일기로 생전에 그토록 소원했던 한국 땅에서 죽어 이땅에 묻힌 블랑슈 수녀는 모든 일을「주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실천한 수도자였다.
73년간의 수도 생활 중 57년을 이역에서 그것도 일본에서의 8년을 제외하고는 49년이란 긴 세월을 한국에서 살아온 블랑슈 수녀는 무엇보다 후진양성과 보육 사업에 심혈을 쏟았었다.
블랑슈 수녀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게된 것은 1906년 18세의 나이로 교편 생활을 하면서 수녀가 될 것을 결심 수도회를 고르던 중 우연히「라비에가톨릭」이란 잡지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회를 알게 됐으며 특히 이 회가 자신의 출생해인 1888년에 한국에 진출한 사실을 알면서 부터였다. 당시 프랑스에 소개된 한국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녀가 돼 꼭 한국에가서 일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됐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22년 2월 종신서원을 한 블랑슈 수녀는 그해 12월 첫 해외 선교지인 일본에 파견됐다. 이곳에서 8년간 불어교사와 수련원장을 역임하면서 블랑슈 수녀는 그동안 몇 번이나 프랑스와 다름없는 일본이 자신의 일터가 아님을 총장수녀에게 밝히면서 한국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블랑슈 수녀의 간원은 마침내 총장수녀를 움직였고 그래서 1930년 12월 5일 그는 그토록 그리던 한국땅을 밟았다. 이때부터 대구수련원을 책임 맡아 1957년 물러나기 까지 무려 27년간이나 그는 많은 후진들을 양성했는데 오늘날 중년이상의 모든 수녀들이 그의 손을 거쳐나갔다. 블랑슈 수녀는 70세로 수련원장직에서 물러난 후 60년 일선에서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3년간 본원장과 백합보육원 원장을 겸임하면서 특히 육아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이 같은 활동은 국가로부터도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8월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중풍으로 오른쪽 수족이 마비돼 투병 중이던 1973년 8월에는 프랑스정부로부터 최고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뭣보다 블랑슈 수녀는 극동에서 활동한 57년 동안 6ㆍ25때 그것도 타의로 인해 단 한번 모국을 방문한 것 외에는 그 후 여려차례에 걸친 본국 휴가권유를 단호히 사양했다. 그때마다 그는『사랑하는 한국 땅에 묻힐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겁이 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기쁘고 잘 된일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제자 수녀들의 잘못과 실수는 모두 자기 탓으로 돌려 용서를 청하는 완전한 자아포기(自我抛棄)의 모범을 몸소 보여준 수도자의 귀감이었다.
한편 블랑슈 수녀는 우리나라에 파견된 프랑스선교 수녀로서는 유일한 생존자였으며 그의 사망으로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외국선교사들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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