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5월 5일부터 9일까지 로마울바노 대학에서 교황청립 포교후원회의 각국지부장들의 연례총회가 개최되었다. 매년 5월에 개최되는 교황청립 포교후원회의 총회는 전년도의 사업보고와 아울러 내년도의 사업을 심의하면서 전 세계전교지방교회(교구)에 분배할보조금을 조정한다.
교황청립 포교후원회는 4개의 단체로 이루어져있다. 즉 전교회와 어린이 전교회, 베드로 사도회 그리고 성직자포교연맹이다. 이 4개 단체에 각각 지부장들이 따로 임명되어있는 나라도 있고(각 단체의 조직이 방대하고 활동이 활발한 나라) 단 한명의 지부장이 이 4개 단체를 한꺼번에 지도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한국처럼 그 활동이 보잘 것 없는나라)
교황청에서는 주교 또는 몬시뇰 급의 고위 성직자 중에서 각국 지부장들을 임명한다.
이번 총회에는 89명의 각국 지부장들이 참석하였다.
연이어 5월10일부터 14일까지는 각국 주교회의선교위원회 위원장들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둘째회의는 금번에 처음 시도된 것으로 첫째, 전교회장(전교사)들의 역할과 둘째, 포교후원회의 각국 지부장들의 역할
셋째, 각국 주교회의 선교위원회 위원장들(자신들)의 역할에 관해 논의했다.
이 회의는 이를 테면 금년11월에 개최되는 포교성성총회의 준비회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여기에는 각국에서 6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주로 언어별로 나누어 매일 그룹토의를 하고 마지막에 종합정리하는 것이었다.
둘째회의의 대표들은 첫째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할 수 있었고 또 첫째회의의 대표들이 둘째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명의 대표가 이두회의에 겹치기로 참석한 분들도 있어서 총인원은 1백16명이었다.
매일 아침 6시 반에는 영어로 합동미사를 봉헌하고 7시에는 라틴어로합동미사를 봉헌했다.
회의는 9시에 시작되어 점심식사 후 잠시 쉬고 저녁7시까지 계속되는 강행군의 나날이었다.
회의는 영어ㆍ불어ㆍ독일어ㆍ스페인어ㆍ이태리어의 동시통역으로 포교후원회의 의장인 루르드사미 대주교의사회로 진행되었다.
5월15일에는 교황바오로 6세께서 이 회의를 격려하시는 특별알현을 베풀어주셨고 5월14일성신강림 주일에는 울바노대학 운동장에서 전교 지방을 대표하는 이들 참석자들이 장엄합동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성대하게 페회 되었다.
이제 이번 대회의 토의내용을 언급하기에 앞서서 4개의 교황청립 포교후원단체, 즉 첫째, 전교회 둘째, 어린이 전교회 셋째, 베드로 사도회 넷째 성직자 포교연맹에 관하여 간략하게 소개해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4개의 단체들은 애초에는 어느 개인이 제창하여 상당한 발전을 이룩한 연후에 비로소 교회당국이 이를 사후 승인하고 급기야는 교황청립이라는 최고의 법적지위까지 인정하게 된 설립과정을 거쳤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4개의 단체들은 전혀 뜻밖의 방법으로 활동하시는 성신의 감도에 의하여 설립된 단체들이라고 볼 수 있다.
一、전교회
19세기 초엽의 포교사업은 세계도처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유럽에서조차도 영신적 물질적으로 희망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1820년을 전후하여 프랑스에서는 영적 쇄신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이 곧바로 포교활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중국 인도지나 아메리카로 갔다. 이와 동시에 이들 선교사들을 영적으로 또한 물적으로 후원하고 아울러 선교사 성소증진을 위한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뽈린 자리고라는 젊은 동정녀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1822년에 프랑스 리용에서 전교회를 창설했다. 그녀의 투철한 신앙과 탁월한 조직수완에 힘입어 전교회는 급속히 발전했다.
뽈린 자리고는 이 단체를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입할 수 있게 조직하면서 각계 각층의 모든 신자들에게 전교회에 가입하기를 전했다. 즉 포교사업을 위해 날마다 일정한 기도를 바치고 아주 작은 금액이라도 성의껏 헌금을 하면 전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전교회가 프랑스선교사들만을 후원해야한다는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설자들은 이전 교회를 전 세계적인 것으로 삼았다.『우리는 이러저러한 선교사들만을 위한 후원회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선교사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단체입니다』
뽈린 자리고는 처음부터 포교활동의 홍보와 선전, 포교정신의 함양과고취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벌써 1822년에「포교사업년보」라는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고 총부수가 17만8천부나 되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잡지가 되었다
연이어 소책자들이 계속적으로 발간됐고 1868년에는「가톨릭선교주보」가 발행되었다.
즉 매년 한 번씩 나오던「연보」가 매주 한 번씩 발행되는「주보」로 발전된 것인데 이「주보」역시 수개국어로 발행되었다.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바로 이러한 잡지의 덕택으로 성소를 받게 되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 잡지의 덕분으로「외방선교회」까지도 설립한분들도 있다.
이 전교회의 활동에 힘입어 여러 교구가 전 세계의 포교활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삐오11세 교황은 전교회의 최고평의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전 세계에 이른바「전교주일」을 설정, 공포했는데 그때가 1정, 공포했는데 그때가 1926년 4월14일이었다.
<계속>
1978년 5월 5일부터 9일까지 로마울바노 대학에서 교황청립 포교후원회의 각국지부장들의 연례총회가 개최되었다. 매년 5월에 개최되는 교황청립 포교후원회의 총회는 전년도의 사업보고와 아울러 내년도의 사업을 심의하면서 전 세계전교지방교회(교구)에 분배할보조금을 조정한다.
교황청립 포교후원회는 4개의 단체로 이루어져있다. 즉 전교회와 어린이 전교회, 베드로 사도회 그리고 성직자포교연맹이다. 이 4개 단체에 각각 지부장들이 따로 임명되어있는 나라도 있고(각 단체의 조직이 방대하고 활동이 활발한 나라) 단 한명의 지부장이 이 4개 단체를 한꺼번에 지도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한국처럼 그 활동이 보잘 것 없는나라)
교황청에서는 주교 또는 몬시뇰 급의 고위 성직자 중에서 각국 지부장들을 임명한다.
이번 총회에는 89명의 각국 지부장들이 참석하였다.
연이어 5월10일부터 14일까지는 각국 주교회의선교위원회 위원장들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둘째회의는 금번에 처음 시도된 것으로 첫째, 전교회장(전교사)들의 역할과 둘째, 포교후원회의 각국 지부장들의 역할
셋째, 각국 주교회의 선교위원회 위원장들(자신들)의 역할에 관해 논의했다.
이 회의는 이를 테면 금년11월에 개최되는 포교성성총회의 준비회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여기에는 각국에서 6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주로 언어별로 나누어 매일 그룹토의를 하고 마지막에 종합정리하는 것이었다.
둘째회의의 대표들은 첫째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할 수 있었고 또 첫째회의의 대표들이 둘째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명의 대표가 이두회의에 겹치기로 참석한 분들도 있어서 총인원은 1백16명이었다.
매일 아침 6시 반에는 영어로 합동미사를 봉헌하고 7시에는 라틴어로합동미사를 봉헌했다.
회의는 9시에 시작되어 점심식사 후 잠시 쉬고 저녁7시까지 계속되는 강행군의 나날이었다.
회의는 영어ㆍ불어ㆍ독일어ㆍ스페인어ㆍ이태리어의 동시통역으로 포교후원회의 의장인 루르드사미 대주교의사회로 진행되었다.
5월15일에는 교황바오로 6세께서 이 회의를 격려하시는 특별알현을 베풀어주셨고 5월14일성신강림 주일에는 울바노대학 운동장에서 전교 지방을 대표하는 이들 참석자들이 장엄합동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성대하게 페회 되었다.
이제 이번 대회의 토의내용을 언급하기에 앞서서 4개의 교황청립 포교후원단체, 즉 첫째, 전교회 둘째, 어린이 전교회 셋째, 베드로 사도회 넷째 성직자 포교연맹에 관하여 간략하게 소개해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4개의 단체들은 애초에는 어느 개인이 제창하여 상당한 발전을 이룩한 연후에 비로소 교회당국이 이를 사후 승인하고 급기야는 교황청립이라는 최고의 법적지위까지 인정하게 된 설립과정을 거쳤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4개의 단체들은 전혀 뜻밖의 방법으로 활동하시는 성신의 감도에 의하여 설립된 단체들이라고 볼 수 있다.
一、전교회
19세기 초엽의 포교사업은 세계도처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유럽에서조차도 영신적 물질적으로 희망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1820년을 전후하여 프랑스에서는 영적 쇄신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이 곧바로 포교활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중국 인도지나 아메리카로 갔다. 이와 동시에 이들 선교사들을 영적으로 또한 물적으로 후원하고 아울러 선교사 성소증진을 위한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뽈린 자리고라는 젊은 동정녀가 동지들을 규합하여 1822년에 프랑스 리용에서 전교회를 창설했다. 그녀의 투철한 신앙과 탁월한 조직수완에 힘입어 전교회는 급속히 발전했다.
뽈린 자리고는 이 단체를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입할 수 있게 조직하면서 각계 각층의 모든 신자들에게 전교회에 가입하기를 전했다. 즉 포교사업을 위해 날마다 일정한 기도를 바치고 아주 작은 금액이라도 성의껏 헌금을 하면 전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전교회가 프랑스선교사들만을 후원해야한다는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설자들은 이전 교회를 전 세계적인 것으로 삼았다.『우리는 이러저러한 선교사들만을 위한 후원회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선교사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단체입니다』
뽈린 자리고는 처음부터 포교활동의 홍보와 선전, 포교정신의 함양과고취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벌써 1822년에「포교사업년보」라는 잡지를 발행하게 되었고 총부수가 17만8천부나 되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잡지가 되었다
연이어 소책자들이 계속적으로 발간됐고 1868년에는「가톨릭선교주보」가 발행되었다.
즉 매년 한 번씩 나오던「연보」가 매주 한 번씩 발행되는「주보」로 발전된 것인데 이「주보」역시 수개국어로 발행되었다.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바로 이러한 잡지의 덕택으로 성소를 받게 되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 잡지의 덕분으로「외방선교회」까지도 설립한분들도 있다.
이 전교회의 활동에 힘입어 여러 교구가 전 세계의 포교활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삐오11세 교황은 전교회의 최고평의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전 세계에 이른바「전교주일」을 설정, 공포했는데 그때가 1정, 공포했는데 그때가 1926년 4월 14일이었다.
<계속>
[교황청 포교후원회ㆍ선교위원장회의 - 회의참가 보고기] 1. 교황청 포교후원회
傳敎會등 4個단체로 構成
선교위원장회의는 금년첫시도-선교지도층역할등 논의
傳敎會는 선교사양성ㆍ후원목적으로「뽈린자리고」가 창설
발행일1978-10-01 [제1123호,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