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하고 회색빛 나는 시멘트 색깔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스무 살을 넘어서 갑자기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그 갑갑함은 어느 정도일까. 단지 시력을 상실했다는 좌절 혹은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고통쯤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맹인 최현숙(아가다·34)씨. 그녀는 21살 한창 나이에 졸지에 시력을 잃었다. 당시 그는 성악을 전공하던 꿈 많은 음악도였다.
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대학 3학년이던 84년 초겨울.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쓰러진 그는 병원에서 당뇨 합병증이란 통보를 받았다. 어릴 적 당뇨로 치료를 받아오긴 했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무래도 소홀했던 것이 화를 불렀다. 안압이 위험할 정도로 높았고 백내장까지 겹쳤다.
입원과 통원치료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85년 말 안압 조절을 위한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수술 후 그녀에게 닥친 것은 암흑, 바로 그것이었다.『수술을 받기 전에 통증은 있었지만 볼 수는 있었거든요. 한데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어요. 담당 의사분도 무척 당황해 하는 눈치였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저를 조금이나마 위로하실려고 그러신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내가!』라는 물음만 계속됐다.
너무 갑갑한 나머지 호흡곤란 증세까지 생겼다.『좀 있으면 낫겠지』하는 희망으로 1년 반을 병원에 다녔다.
87년 봄 최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의사로부터『주님만이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우리 기도하자』는 말을 전해 들었다. 포기하라는 마지막 통보였다.『돌아오는 길 택시 안에서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도 딸자식이 가련해서인지 울음을 참지 못하셨어요』.
최씨는 84년 처음 입원했을 당시 수녀인 고모의 권유로 대세를 받았고, 86년 통원치료 중에 부산교구 중앙성당에서 정식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갓 태어난 신앙이 맹인이 됐다는 인간적인 좌절과 고통을 대신하기에는 벅찼다. 호흡곤란 증세는 계속됐고, 고함을 치며 난리를 피워야 조금은 속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피아노 건반에「도」를 쳤는데「레」가 울릴 때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그냥 본다는 것이,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방황과 고통 속에 보내면서 언제부턴가 하느님을 노래하는 곡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기엔 나의 아픔과 기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느님의 이끄심은 이처럼 너무도 신비롭게 다가왔다.
주위 분들의 권유로 92년 5월 민락성당 성모의 밤 행사 때 그녀의 자작곡 발표회를 본당 청년회 주최로 가졌다. 이런 노래들을 늘 함께 부르고 함께 기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해 여름 노래패「늘 함께」가 태어났다.
「늘 함께」는 일 년에 5~6회 정도 공연을 가지며 본당이나 공소, 수도원, 특수사목 지역 등에서 주로 연주한다. 피정 때 초청되는 경우도 있다.
최씨가 지은 노래는 40여 곡에 이른다. 주로 생활성가곡이다.
『이 세상/시련으로 부서진 영혼이라면/주여, 차라리/우리를 거두소서. 그러나/가슴속에 작은 소망/아직 남았다면/주여 그땐 어찌하시겠나이까』 (곡「그때는」중에서).
이처럼 초창기 그의 노래는 인간적인 고통과 우울을 발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최근작「일어나라 비추어라」엔 감사의 희망과 찬미가 돋보인다. 그의 내면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두운 내 영혼에/님이 빛을 비추시어/아무 것도 아닌 내가/그 빛으로/빛나네(중략). 일어나라 비추어라/그의 빛을 증거하라. 찬미하라/아름다운 그의 모든 것을』.
최씨는 지금도 힘이 들 때면 풀썩 주저않아 울기도 한다. 인간적인 고통과 아픔이 견디기 힘들 때도 있다.『저는 아직도 저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젠 힘들 때면 힘든 대로, 즐거울 땐 즐거운 대로 하느님께 맡기고 함께 하소서 하고 기도할 따름이지요』.
음반을 내고 싶은 게 가장 큰 소망이라는 최현숙씨.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통이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리고『주님하고 그냥 살아요』하며 그의 삶이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