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0일 서울대학교는 한국 화단의 거장 우석 장발(루도비코 96세) 선생의 흉상을 그가 창설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정원에 세웠다. 한국 미술 발전의 초석이 된 장발 선생은 가톨릭미술인회를 창설, 성미술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으며 그의 후학들은 현재 한국 미술계의 중심 화가들로 성장해 있다. 한국 화단의 중심 인물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것은 바로 장발 선생의 큰 영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정도로 그는 신앙의 전수에도 열정적이었다.
현재 미국 피츠버그에 거주하고 있는 우석 장발 선생은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년 작가 못지 않은 필력을 아직도 펼치고 있다. 장발 선생은 최근「성모승천도」「성 안드레아 김대건 초상」을 그리는 등 작품활동에 대한 열정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본보는 장발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후학들에게 미술가로서 구도의 한 길을 걷고 있는 노 대가의 최근 작품들과 근황을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 최종태(요한·서울대) 교수의 현지 인터뷰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올해 나이 아흔 일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장발 선생은 건장한 체구에 언어, 동작이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내가 현관을 들어서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일어서서 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데 그 힘이 젊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소파 뒤에 있는 구곡 병풍이 첫 눈에 들어왔다. 선생이 환갑 때 선사 받은 그림들이라는데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당대 명필이 쏙 뽑혀 깔끔하게 표구된 채로 있었다.
『손재형 이 글씨 좋은 것이예요. 청전, 이 그림 특별히 좋은 것이예요』하고 그림 내력을 설명하는데 그 기강과 단호함에 놀랍도록 힘찬 울림이 있었다.
노수현, 허백련, 김용진, 장우성 등 낯 설지 않은 그림들로 하여「장발」이라고 하는 한 인생이 방안 가득히 거대한 나무처럼 자리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서울에서 들고 간 사진첩을 선생 앞에 꺼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작년 12월 10일 서울대 미대 교정에 초대 제막식이 있었다. 최의순 교수가 제작한 멋스러운 브론즈 작품이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옛날 휘문학교 시절 선생의 첫 제자인 박갑성 선생을 비록하여 오랫만에 많은 제자들이 모였다. 모두가 60이 넘어 백발이 성성하였다. 수십 장이나 되는 기념 사진들을 그는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40년 전의 얼굴들이라서 잘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 분이 누구신가? 아무개입니다』하고 나는 크게 소리쳐야 했다. 난청의 상태가 그 정도였다. 마침 뉴욕 맨하탄 천주교회를 맡고 있는 아들 장흔 신부가 자리를 함께 하여 대화를 도와주었다.
『옆 얼굴이 좋아, 실물보다 잘 만들었군!』하고 죠크를 하였다.『이 분은 누구신가? 아무개입니다』히거 장흔 신부와 함께 소리 질러 설명을 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제자들은 다 늙고 모습이 변하여 알아보지는 못하였으나 이름들은 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901년에 탄생, 20세기 100년을 살으시며 한국 가톨릭 미술을 최초로 현대화하는 초석을 쌓으시고 또 한국에 최초로 미술대학을 창설하였으며 그 두 가지 시대적 사명에 헌신하다가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하여 모든 것이 좌절되고 고국을 등진 채 40년.
방 안은 온 벽이 그림들로 가득히 메워지고 있었다. 모두가 지난 10여 년 간의 작품들인 것 같았다. 몇 점의 가족 그림을 빼 놓고는 모두가 성화 상 이었다.「골롬바, 아녜스」는 예전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정취를 나타내고 있었다.「정하상 바오로」「성삼위일체」그림 등 나는 일일이 다 기억을 할 수가 없다. 숫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안내하는 대로 따라 보던 중 그만 놀라서 흥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의 먹그림 같은 추상그림 하고는 전혀 다른 지극히 사실적이고 소박한 성화들이었다. 특히 놀랍게 돋보이는 것은 성부 성자의 의상을 조선 옷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었다. 나는 여적 성삼위 그림을 많이 접해 보았지만 조선 옷으로 표현한 예는 보지 못하였다. 그 그림 아랫부분에는 성모님을 앉혀 놓고 있었는데 나는 그 까닭을 물을 여유 조차도 없었다.
아랫층 위층 할 것 없이 벽마다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만 흥분해 있었는 것이 아니라 선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장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90의 노경에도 그 필력은 쇠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온 삶이 성화상으로 정성되이 마무리되고 있는 듯 싶었다. 화사한 색채, 소박한 필법으로 고국의 산과 들을 그리고 있었다. 뜻에 충실한 화면의 구성과 완숙한 소묘력으로 하여 옛날의 성화상들에 비해서 그 완성도가 오히려 높게 보였다.
성모승천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상이 있었다. 머리 위로는 화환이 얹혀지고 있고 손에는 백합을 들고 있었다. 특히나 매력적인 그림으로는 역시「골롬바 아녜스 상」이 아닌가 싶었다.
두 자매는 꽃길을 가고 있다. 멀리 남대문인지 안개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서울의 봄날 같았다. 그림마다 사연도 많을 것이련만 장발 선생은 자기의 그림들 앞에서 설명으로는 다할 수 없는 복받치는 감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 점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고 또 거기에 담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그저 묵묵할 뿐, 나는 오직 그의 눈빛으로 감정을 전달 받을 뿐이었다.
점심 때가 되어 우리는 식탁에 모두 앉았다. 나는 노 스승을 뵙는 감격에 한 말씀 한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고 저으기 긴장하고 있었다. 식사 중에 별안간 선생이 벌떡 일어났다. 벽에 가족도가 걸려 있는데 앞에 있는 따님과 신부인 아들이 그림 속에 있다고 가르켜 주려는 뜻에서였다. 부인의 모습도 있고 또 옛 혜화동 집이 정확히 그려져 있었다. 따님의 모습은 여러 그림에 등장하였다. 그림들을 보고 있는 중에 나는 그곳이 미국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생활이나 사고나 그 몸가짐은 예나 다름없이 엄격하였으나 체취는 아주 노인스럽게 다정하였다. 백수를 바라보는 노경임에도 그림 이야기 할 때는 확실하고 힘찬 어조로 바뀌는 것이었다. 자랑스런 서울대 인상을 상기하면서 서울대학교 상징 마크를 만들 때의 일을 물었더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설명을 해주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에다가「ㄱ,ㅅ,ㄷ」(국립서울대학교)이라고 쓰시면서 월계수 가지를 돌리고 가운데 LUX라는 글자는 당시 김태관 신부가 넣자고 해서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말씀하는 모습에는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만면에 희색이 역력하였다. 지금껏 서울대학교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각종 인쇄물에 50년간 수도 없이 그려져서 대내외에 널리 퍼진 그「서울대 마크」란 도안은 그렇게 해서 장발 선생에 의해서 고안되고 그려진 것이었다.
개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또 천주교회에 박해가 풀려나면서 20세기를 여는 즈음 이 땅에 태어나서 이내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삼일 독립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만국의 한을 달랬을 장발 선생이 일찌기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여 신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새로운 성미술의 필요성을 선견하였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이 땅에 교육의 주인들을 길러냈다. 만약에 이 분이 지금껏 고국에서 삶을 엮어낼 수 있었더라면 다른 일은 고사하고라도 한국 교회 미술 분야에서 막대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한 위대한 인물이란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공공의 가치 증진에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런 면에서 우리의 지난날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되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또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모든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그 옛날 김대건 신부 상을, 그리고 명동성당 12사도 그림을 그릴 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한국 사람 성화를 그렸으며 그것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 애초부터 의도하였다.
그런 뜻이 어떻게 배태되었는가 듣고 싶은 것이었다. 그 언젠가 로마에서 한국 성인 시복식이 있었는데 그때 바티칸 행사에 참석한 이가 장발 선생으로 그때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터였다. 해방이 되고 1950년대 중반에 혜화동 성당을 기획하고 여러 해에 걸쳐서 미술가들을 전폭적으로 참여시킨 그 선견지명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새로운 교회 미술에의 선언을 십 년이나 앞선 일이어서 선생의 여러 가지 증언을 들어 기록을 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여의치 못하였다. 더욱 간절하였던 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 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들어 새기고 싶었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흔 신부에게 메모하여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장발 선생은 꼿꼿한 자세로 전하는 말을 보다 정확히 받아들이려고 경청하는 모습이 진지하였다. 선생의 애제자의 한 분이자 나의 스승 김종영 선생(프란치스꼬)의 영세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그 사람 좋은 사람이예요!』하고 두 번이나 같은 말로 강조하였다.
장발 선생은 20세기의 한국 미술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한 거목이며 그가 끼친 영향이 지금도 이 사회에 유형 무형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아흔 일곱해. 이 나라의 풍상을 한몸에 담고선 한 거인의 풍모가 신기루처럼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화가요 교육자로서 이땅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켜내고 교회 미술을 일으킨 선구자 장발 선생은 객지 생활 끝에서 가톨릭 미술상을 받고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받고 그가 창설하고 10여년간 기틀을 잡은 미술대학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업적에 비하면 작디 작을 수 있겠으나 그를 기리는 정표로서 모국의 따뜻한 선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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