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천년기의 여명까지는 이제 겨우 3년이 남았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시각으로 이른바 인류의 여정을 평가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가 서 있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출발하여 다함께 참된 평화의 순례를 떠나는 단호한 결단을 내릴 때가 왔습니다. 분명코 정의와 인간존엄의 요구를 수호하면서 평화 회복의 길을 도울 수 있는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 진정한 용서의 태도가 뿌리 내리지 않는 한 어떠한 평화의 과정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깊은 확신을 가지고 저는 용서의 길을 따라 평화를 추구하도록 모든 분들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상처 받은 세계가 치유를 갈구합니다
현대 세계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도 모순 투성이입니다. 산업과 농업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한층 높여주었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긍정적 측면들을 우리 어찌 기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세계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징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징표들에는 이제 그 도를 넘어선 물질주의와 인간생명 경시풍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 명예, 권력의 법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규범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어찌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비탄이 우리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양심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마주하고 또 하느님과 마주하게 되는 내적 지성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이웃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용서하고 용서를 청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용서의 어려움은 현재의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쉽사리 벗어 던질 수 없는 폭력과 분쟁의 무거운 짐을 안고 있습니다. 권력의 남용, 핍박, 전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러한 슬픈 사건들의 원인은 먼 과거 속에 묻혀 버렸어도 그 파괴적인 휴유증이 남아 가정, 인종, 집단 그리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두려움, 의혹, 증오, 분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보복의 악순환은 다시 찾은 자유 곧 용서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자면 우리는 경솔하고 일방적인 편견을 버리고 다른 민족들의 역사를 볼 줄 알아야 하며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전쟁은 비록 그 유발 문제들을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평화협상에 무거운 짐이 되는 엄청난 희생과 파괴를 남길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모든 사람들과 민족들과 국가들은「전쟁문화」를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최첨단의 기술에 익숙해 있는 요즘 시대에는 견실한「평화의 문화」를 발전시켜 가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 다.
그러나 지속적인 평화는 단지 체제나 구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진심으로 용서하는 역량과 상호인정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공존 양식의 채택에 달려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고 베푸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일이며 용서만이 뿌리 깊은 폭력과 증오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용서의 전제 조건
가장 진실되고 고귀한 형태의 용서는 사랑에서 오는 자유로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바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 고유한 요구를 지닙니다. 그 첫째 요구는 진리에 대한 존중입니다.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절대 진리이십니다.
거짓과 허위의 씨가 뿌려진 곳에는 의혹과 분열, 부패가 난무합니다. 정치나 이념의 조작은 본질적으로 진리에 위배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회적 화합의 토대 자체를 위협하며 평화로운 사회 관계의 가능성을 손상시킵니다.
용서는 진리를 요구합니다. 저질러진 죄악은 인정하여야 하며 가능한 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위한 또 다른 근본 요건은 정의입니다. 정의는 하느님의 법 안에서 또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계획 안에서 그 궁극적 토대를 발견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상황들이 화해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평화를 크게 좌우하는 이러한 요구 앞에서 저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특별히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화해의 활동에 헌신하여 주기를 호소합니다.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개인과 전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세상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화해를 위하여 봉사하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의 의무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교회를「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전 인류와 일치」를 이루는 성사로 삼아, 당신의 계획 안에서 화해의 표징과 도구가 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자신을「화해의 봉사자」로 여겨야만 합니다.
그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또 형제들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진리와 정의의 힘으로 평화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2천년 대희년의 경축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는 성령께 완전한 일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하면서 다함께 그리스도의 용서를 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형제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호소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특히 민족적 인종적 갈등이 극에 달한 곳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거울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증오가 스며들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쁘게 선포하며 화해의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나누어 주십시요.
여러분 자녀의 첫 번째 신앙 교육자인 부모님들에게 요청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모든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또한 편견없는 신뢰와 수용의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거울이 되십시오. 화목하고 일치된 가정을 이루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젊은이들을 복합적인 역사와 인간문화 속으로 인도하면서 그들에게 생명의 참된 가치를 가르치도록 부름 받은 교사들에게 요청합니다. 젊은이들이 모든 상황에서 관용과 이해와 존경의 덕목을 실천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마음 속에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의 보화들을 나누어 갖지 못하게 하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평화 속에서 서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십시오.
폭력을 물리치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며, 화해를 이룬 참으로 인간다운 세계를 건설하십시오.
공동선에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공직자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관심사에서 배제하지 말고 사회에서 가장 힘 없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대중매체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요청합니다. 여러분의 전문직이 요구하는 막중한 책임 을 의식하고 결코 증오와 폭력, 허위에 물든 메시지들을 조장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인간에 대한 진리를 명심하십시오.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은 인간의 복리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분들에게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용서와 화해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도록 권유합니다. 또한 평화를 위하여 바치는 여러분의 끊임없는 기도를 형제애와 상호 수용의 행위로 뒷받침하도록 권고합니다.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저는 새로운 사랑의 문화 건설에 줄기찬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다시 한 번 열망합니다.
용서를 베풀고 평화를 얻으십시오.
바티칸에서 1996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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