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에 의해서 창립된 한국 천주교회가 40일 후면 새 천년기-은총의 대희년을 맞게됐다. 특별히 오늘 20세기 마지막 평신도주일을 맞아 본보의 「새 천년을 여는 특별기획-20세기의 끝, 21세기의 시작」의 시리즈 순서를 바꿔 「평신도」편을 다루고자 한다.
사목의 주체로서의 평신도
「평신도 문제」는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평신도는 교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사목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그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평신도의 위치를 강조하지만 실제로 교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위상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이 기산 이후 21세기 「평신도」의 위상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가? 한 마디로 그 해답은 불과 20여일전 치러진 대희년 맞이 평신도대회에서 나왔다.
한국천주교회 평신도들이 「새천년기 새복음화 주역」으로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교회」라는 주인의식 없이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음을 고백한다』는 자기 성찰로 시작된 「평신도 선언문에서 평신도의 본분인 현세질서의 성화를 위해 적극 나설 것임과 더불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앞장서겠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벌써 교회의 일각에서는 이번 대회에서 채택된 「평신도 선언문」의 내용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신앙 따로 생활 따로」라는 교회 구성원들의 만성병을 지적하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결국 한국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의식과 자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어쨌든 평신도 선언문의 『「내가 바로 교회」라는 의식을 가지고 현세질서의 복음화와 교회의 내적쇄신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짐을 실천하는 일이야 말로 21세기를 맞는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새천년기 평신도상
대다수 한국의 평신도들은 공의회가 끝난지 34년이 지나도록 자신을 교회 안의 한 계층, 교회 구성의 일부로만 여기고 있을 뿐, 스스로가 교회를 이루는 교회 자체라는 가르침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평신도는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표명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인식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비근한 예로 『교회에 간다』는 말은 해도 『내가 교회다』라고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해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표현은 생소하여 틀린 것처럼 들린다. 평신도는 「우리는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교회다」라고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평신도 선언문」은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싶이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희년과 새 천년기에 요청되는 평신도 사도직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오늘의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문제와 우리 자신의 현실을 평신도의 눈으로 진단하기 위한 선언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이 선언은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비추어 오늘의 현실을 반성하는 가운데 현재와 미래에 요청되는 바람직한 평신도 사도직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선언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 즉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참여해 교회와 사회의 현실을 복음의 빛으로 분석, 진단하고 선교 3세기에 요청되는 민족복음화의 과제와 실천방법을 모색한 1984년의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 그 중에서도 평신도 의안을 기초로 삼고 있다.
평신도 의안을 기초로 마련된 이번 선언은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이후의 환경변화와 반성, 그리고 교황교서 「제삼천년기」의 권고에 따른 우리의 반성도 함께 담고 있어 이땅에서 요청되는 바람직한 평신도상, 즉 세 번째 천년기 한국 평신도들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은 제7항에서 『사람들이 현세 질서를 바로잡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온 교회의 임무』라고 밝히고, 『평신도는 현세질서의 쇄신을 고유의 임무로 알고, 현세질서 안에서 복음의 빛과 교회정신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써 구체적으로 직접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평신도의 사명이요, 소명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신 말씀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가는 올바른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고, 평신도들은 그들 나름의 적합한 길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실제로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 긴 기도나 엄격한 고행의 길, 또는 세상 도피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들은 가정과 사무실, 학교, 국회, 거리, 그리고 활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휴식 중에도 자신들이 처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와 더불어 교회를 구성하는 신분으로 다 같은 하느님 백성이며 양적인 면에서 전체 신자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평신도인 부모들에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보면 2000년 역사를 이어 내려오면서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케 하는 데에 평신도가 기여하는 바는 참으로 큰 것이다.
21세기는 평신도의 시대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의 제3권인 평신도 의안에서도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본연의 위치를 인정받고 활동할 때는 교회가 영적으로 풍요로웠고 세계를 향해 발전했던 반면테, 평신도가 교회의 본질적 요인에서 탈락되어 부수적인 것같이 취급되었을 때는 교회가 외형상 아무리 화려하게 나타났다 해도 조만간 쇠퇴의 길을 걸어야 할 숙명을 자체 내에 배태하였다』고 지적하면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 안에서 평신도 본연의 위치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세기, 21세기는 평신도의 시대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자세가 어떻든 또 자각하든 안하든 평신도의 시대는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의 미래는 평신도의 손에 달려있다」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이 땅에 파견된 교회의 미래는 우리 평신도들의 미레에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좌우된다. 눈앞에 닥쳐온 새 세기는 분명 평신도의 시대라고 한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평신도의 행동노선으로서, 이는 어디든지 다 적용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오늘날 각 개 개인뿐만 아니라 그룹이나 무리를 지어서도 함께 성덕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말하는 「조직적인 사도직」인 동시에, 이 공의회로 해서 태어난 교회운동과 공동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난 봄 한국교회를 방문한 바 있는 피에르코다 몬시뇰 같은 신학자는 교회내에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는 운동과 공동체들은 『성령의 선물로써 「공의회의 봄」이 오래도록 기다려 온 결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해 1998년 5월30일 성베드로광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운동과 단체 회원 수십만명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앞에서 친교와 협력을 다짐한 이래 귀중한 결실을 맺고 있으며, 이는 『희망 가득한 교회의 새 봄을 기대하게 해주는 것』(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9.5.23 성령강림대축일 삼종기도 때 강론)이다. 지난 달 21일 서울에서 가진 평신도대회 오전행사 또한 이러한 정신에 따라 한국교회 내 운동과 단체들이 자리를 함께 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요즘 확산되고 있는 소공동체운동 역시 세상에 사는 평신도들이 생활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과제로 여긴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선조의 얼을 이어받아
미래의 교회는 성직자 위주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그리스도가 주권을 지닌 교회이다. 이는 평신도, 성직자 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니는 교회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란 최대한 각자의 은사를 살리면서, 타인의 은사를 존중하는 교회이다(고린토 1서 12장), 그리고 공동체 내의 갈등은 복음정신 안에서 함께 사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교회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평신도상은 어떤 것인가? 외국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교회를 창설했던 한국교회 평신도들은 새로운 세기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오늘의 한국교회 평신도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창설기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천주교회는 다른 지역교회의 경우처럼 선교사 파견을 통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결실을 본 자생교회라는 특징을 지니는 까닭에 평신도의 역할이 그만큼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 문제에 관한 한 한국교회의 역사는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서구교회의 상황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출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평신도의 의미와 가치가 서방교회의 그것처럼 잊혀지거나 왜곡되었던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좀더 평신도 사도직의 의미가 심화되고 뿌리내릴 수 있는 기틀을, 연구 발전시키고 무엇보다 한국교회에서의 자랑스런 평신도 호라동의 전통이 깊이있게 이어질 수 있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평신도가 생활현장에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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