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정원문화가 발전한 나라이다. 거기에는 독특한 정원들도 많다. 모래와 돌만 사용해서 자연을 축소한 듯한 정원도 있다. 이것을 이른바 고산수 석정(枯山水 石庭)이라고 한다.
이 석정은 일본의 선불교를 조형한 것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교토의 료안지(龍安寺) 석정이다. 이런 석정이 일본 선불교를 대표하고, 나아가 외국인들에게는 일본 자체를 연상케 하는 고도의 정신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고산수 석정을 고안해 낸 사람이 선종의 고승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가 바로 그 사람이다.
무소오는 뛰어난 선승으로서, 중세 세계의 디자이너 또는 일본 문화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화엄경」 법계연기의 모습을 고산수 석정으로 조형했다고 한다. “흙을 쌓지 않고도 높은 봉우리가 높이 솟았으며, 한 방울의 물도 쓰지 않고 폭포가 소리를 내며 흐른다”라는 무소의 시에서 석정의 조형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일본과 비교한다면 우리의 불교적 문화유산도 상당하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비근한 예로 순천 선암사를 들 수 있다. 선암사는 전각의 구성이나 배치, 규모면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찰이다. 선암사 뒤켠에는 운치 있는 수조가 있고, 이어 그 뒤 사립문을 열고 나가면 차밭이 있다. 선암사의 차 전통은 꽤 오래 되어 보인다. 처음 나무숲 아래 펼쳐진 이 야생 차밭을 보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찬탄이 절로 나왔다. 옆에 안내하던 분이 얘기하기를, 한 일본 차인이 이 차밭의 아름다움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차밭을 가꾼 선암사 스님들의 구도적 정신을 느낀 것이다.
퇴계를 모르고서는 조선시대를 이해하기가 곤란할 것 같아서, 「퇴계전서」를 읽어본 적이 있다. 그때 건축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퇴계를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건축할 장소를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설계를 손수 면밀히 검토하여 완성한 건축물이 바로 도산서원이다. 사는 장소와 공간이 곧 그 사는 사람을 규정한다는 말과 같이, 건축물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도산서원을 보면 퇴계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건축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도산서원의 출입구와 공간, 배경과 전망을 살펴보면 강학과 수행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도산서원은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의 심오한 사상과 정신이 표현된 공간으로, 조선시대 유교 건축물의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최고의 예술품 뒤에는 항상 종교가 자리하고 있다. 종교야말로 인간 의식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기 때문에, 그러한 배경 위에서 최고 수준의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조국 스페인의 문화적 전통과 가톨릭 신앙이 자기 예술의 원천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스페인에 가보고서 그 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게 전해진 문화유산도 그 각 시대의 생활 일부였다. 고대 유물과 유적이 화석화되어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창조된 당시에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삶의 도구였다. 이제 이들 문화유산은 생활의 생생함을 상실하였고, 역사, 관광, 교육, 보존 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석굴암과 같은 경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배대상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적 정서, 미감, 교리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와 현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결국은 명품이라고 평가되는 고대의 유물 유적도 과거에 생활의 일부로써 창조되었듯이, 오늘날 우리도 현대판 유물과 유적을 창조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여 년 역사의 한국 천주교회는 19세기 어려운 시대의 씨앗을 잘 가꾸어서 20세기에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200년이란 긴 시간으로, 하나의 독립된 양식의 문화와 예술을 창조해낼 수 있을 만하다.
새로운 세기 21세기에는 이제 꽃을 피울 수 있는 시기이다. 상처받은 현대인의 심성을 어루만져 치유해줄 수 있는 신앙과 영성은 물론, 고산수 석정을 창안했던 무소 소세키, 선암사 차밭을 일군 스님, 도산서원을 만든 퇴계와 같은 안목과 식견을 갖춘 많은 천주교 성직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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