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다교 유산
계약을 통해 토라를 받은 선민들은 그것을 무거운 짐이라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멍에로 여겼다. 왜냐하면 비록 약한 인간이나 은총과 친교와 하느님과의 계약의 측면이 토라에서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엄한 율법이지만 선민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선물인 토라는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레위 11,44 19, 220,7)는 말씀으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윤리생활과 성덕을 닦기 위한 수행생활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7)윤리와 신비주의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라는 야훼의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거룩하신 야훼를 본받아 선민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선택과 말씀을 제일 먼저 받고 믿은 사람은 아브라함이었다. 그를 부르신 하느님은 그에게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창세 17,1)라고 하셨다.
그리고 최초의 예언자는 모세이다. 그는 율법을 준 사람일 뿐 아니라 자기 안에서 또 자기 주변에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생생히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다.
그리고 위대한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선민은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지 않을때는 그분의 눈밖에 나고 만다.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는 사람은 다 이렇게 된다. 그러나 그분께 순종하고 전적인 신뢰로 그분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느님은 모두 받아들이신다. 토라는 선민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으며 그것은 그들에게 성덕에 대한 요구였으며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는데 있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레위 11,44). 거룩함에 대한 요구는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본받을 수 있다는 절대적 의미는 아니다. 즉 하느님처럼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전적으로 타자이므로 그분은 모든 가능적인 표상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은 제작이 금지되었다.
다만 이스라엘인들은 의식적인 면에서 모든 불완전함과 불결한 것으로부터 떠나야만 했다. 이러한 항구한 금기 사항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거닐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주님의 뒤를 걷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너희의 하느님 야훼만 따르고 그분만을 공경하여라. 그의 명령만 지키고 그의 말씀만 들어라. 그분만 섬기고 그에게만 충성을 바쳐라』(신명 13,4).
선민이 하느님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정화 예식을 한 것은 죄 때문이었다. 즉 죄는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에 대한 불복종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성서 전체에서 흐르는 한 현상은 선민들을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너희가 얼마나 반항적이고 고집이 센지 잘 안다』(신명 31,27)라는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이집트 탈출을 후회하엿고(출애 14,1 이하) 씬 광야에서 이집트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불평하였다(출애 16,3). 만나를 먹을 때도 하느님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출애 16,16~20)그들의 외고집과 우상숭배는 모세를 비롯한 예언자들의 탁월한 주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충과 불경 중에서도 그들의 제일 큰 죄악은 우상숭배와 배교였다.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계약을 맺은 선민이 그 하느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큰 죄악이었다.
풍요의 신 바알에게 가서 제물을 드린 행위나 이교인들의 신들을 끌어들여 신당을 세우는 행위들은 모두 배반으로써 큰 죄악이었다.
이와 못지 않게 큰 죄악은 이웃에 대한 정의를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호세아가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더 좋아하신다고 말한 것을 중시해야 한다.(호세 6,6). 선민들은 인간의 실수와 죄를 깊이 느끼게 되자 통회의 기도와 여러 속죄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통회의 기도인 시편 51장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 다윗이 죄를 범한 후 뇌우치는 기도이며 각자의 죄와 집안의 죄 그리고 전 백성의 죄를 벗기는 속죄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죄의 윤리화는 유다교를 도덕의 종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영성화 시켜 나갔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찬미와 연결된 특별한 형태의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의식을 통한 전례가 바로 인간과 하느님이 만나는 행위이고 유다이즘의 한 평태가 신비화되어 갔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내재(內在)와 초월, 현존과 부재(不在) 사이에 긴장감을 주시지만 선민들은 구름과 불기둥, 계약궤와 성전을 통해 『하느님이 거기 계신다』고 믿고 찬미와 감사 영광과 흠숭 그리고 속죄의 제사를 올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례가 바로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기 위함이고 그 자체로 『신비스런 만남』을 강조하는 종교로 전체 윤리 생활을 바꾸려는 일종의 종교적 감각의 심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교가 요구하는 마음의 정화는 단순히 내적인 올바름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세상의 주인이시자 인간의 생사를 온전히 주관하시고 약속에 충실하시며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고자 하는 지향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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