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문단사의 여류시인 1세대에 속하는 원로 홍윤숙(테레사·85) 시인이 열여섯 번째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문학동네/148쪽/7500원)를 펴냈다. 신작 시집으로는 지난 2004년 선보인 「지상의 그 집」 이후 6년 만이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세 번의 큰 수술과 긴 투병생활을 견뎌낸 시인은 ‘생의 마지막 시집을 엮는다’는 소회로 최근 5년간 쓴 작품들을 모았다. 그는 “수술과 병상생활로 인해 심신은 황폐해지고 공황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며 “그 악몽 같은 나날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나를 지탱해준 것은 이 마지막 시집에 대한 작은 희망이었다”고 밝혔다. 인생의 굽잇길을 돌아온 노(老)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지나온 삶을 담담하게 되돌아본다. 젊은 날의 회한과 황혼의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지만 결코 외롭거나 초라해 보이진 않는다. 시력(詩歷) 63년이란 수식어가 무색하듯 여전히 수줍은 문학소녀의 설렘과 떨림을 뿜어낸다.
‘가랑머리 소녀 시절 / 소풍 가던 봄 들판이 펼쳐졌다 / 이름도 모를 풀꽃들이 풀어내는 / 향기에 취해 혼곤히 몸이 풀려 깜박 / 예닐곱 살 어린 날의 계집애가 되어버렸다’ (‘고서점’ 중)
전 열 편이 차례로 실린 ‘빈 항아리’ 연작에선 시인의 구도자적 자세도 엿볼 수 있다.
‘바람 불고 가랑잎 지는 가을이 오니 / 빈 항아리는 비어 있는 속이 더욱 출렁거려 / 담아둘 꽃 한 송이 그리다가 / 스스로 한 묶음의 꽃이 된다’ (‘빈 항아리1’ 중)
반세기 넘는 세월을 시와 동거해온 시인에게 도대체 ‘시’란 무엇일까. 시인은 시집 말미에 실린 에세이 ‘언어, 사랑의 관계지음’에서 “시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고 성서이다. 하여 나는 날마다 그 스승을 따라 성서를 안고 희망으로 떠났다가 고통으로 돌아온다”며 “그러나 고통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산실이기에 피하지 않고 몸을 던진다”고 고백했다.
시인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번 시집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언젠가 방랑(放浪)이란 낱말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이 얼마나 신선하고 유혹적이며 심신을 뜨겁게 달구는가를, 청춘의 또 다른 말 방랑. 다시는 없을 그 푸르던 날들을 아득히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