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이 고3이다. 그 탓에 지난 몇 주 동안 수시 원서를 내느라 고3 부모 흉내를 좀 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얘기했다.
지금까지 내가 진로에 관련해 딸들에게 해온 얘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앞으로 한 가지 직업으로 평생을 살 가능성은 거의 없고 여러 직업으로 바꾸어가며 살게 될 것이니 직업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이라고.
둘째, 무슨 공부와 직업을 선택하든지 개인 욕심보다는 인류와 세계, 나아가 생태계에 보탬이 되는 것을 선택하라고.
매주 함께 책 읽는 토론모임을 갖는 등 다른 어떤 부모 못지않게 평소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도 큰딸의 앞길은 아직도 안개속이다.
공부로는 생물학, 생명과학 공부가 가장 끌린다는데,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단다.
딸 얘기를 들으며 내 딸이 대한민국 교육을 정상으로(?) 받았구나 싶었다. 보통 학교에서 공부만 하라고 했지 미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이끌어주지 않으니 온 삶을 바쳐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막연한 게 당연하다 싶었다.
나로서는 이번 기회에 대학별 입시 요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는데, 새삼 일반 고등학교 나와서는 이른바 일류대학 가기 어렵게 생겼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라는 소신에서 큰딸과 둘째딸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같은 여자고등학교에 배정된 걸 너무 좋아했는데, 그게 세상 이치는 아닌 모양이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고등학교부터 좋은 고등학교에, 특목고나 좋은 학군의 고등학교에 가야 한다.
그래서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부모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형벌을 받을 수 있는 명백한 범죄 행위인 위장 전입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사회 현실은 최근 총리와 장관 후보 인사 청문회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번 청문회에서도 어김없이 위장 전입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제 투기 목적이 아니라 자녀 진학을 위한 위장 전입은 낙마 이유가 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대선 과정에서 위장 전입 사실이 불거졌지만, 투기 목적이 아니라 자녀 진학을 위한 것이었다고 사과하였다. 그 선례 탓인가? 자녀 진학을 위한 위장 전입은 사과하면 그걸로 끝이다.
이 문제를 다룬 심야 토론 프로그램에서 토론자로 나온 대학 교수란 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
“흠결 없고 자질 있는 분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없잖아요? 그러니 정말 큰 문제가 아니면 일 해볼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더 중요한 게 자질이니까요.”
이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토론자였다면,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맞다. 청렴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 있다. 지금 도덕성을 떨어져도 능력 있는 사람을 쓴다면 앞으로도 도덕성과 자질을 동시에 갖춘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능력은 떨어져도 도덕성 있는 사람을 쓴다면 앞으로 도덕성과 자질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 나올 것이다.”
자녀 진학을 위한 위장 전입이 큰 문제인 것은 그로 말미암아 기회를 박탈당하는 억울한 학생이 있다는 당장의 문제뿐만 아니라 학생 당사자가 잘못된 생각을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차지해라. 힘을 갖게 되면 그게 문제가 되지 않다.’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윤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맘몬을 섬긴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우리는 맘몬에 맞서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이다. 우리부터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세상 이치에 어떻든 양심을 먼저 선택하는 본보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미 본당마다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가 시작되었으니, 내 자식 우리 자식만의 성공, 내 자식부터의 성공을 바라는 이기심은 위장 전입과 뿌리가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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