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과 야유회를 떠나는 길에 먼저 순교자 묘소 두 군데를 참배했다. 한 곳은 경남 진영에 있는 신석복 마르코 묘소이고, 또 한 곳은 경남 진례에 있는 박대식 빅토리노 묘소였다. 마산교구 관할에 있는 다섯 순교자 묘소 중에서 이 두 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직원야유회라 매우 심사숙고해서 행선지를 정하게 되었는데, 올해는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는 해일뿐만 아니라 125위 시복시성운동이 막바지에 달한 때라 순교자 묘소 순례에 의견이 모아졌다. 특히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장이신 박정일 주교님이 우리 교구에 계시다보니, 가끔 만나 뵐 때면 어김없이 시복시성기도문을 건네며 기도를 많이 하도록 당부하셨다. 연로하신 주교님께서 손수 워드작업을 하여 정성껏 만드신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문을 몇 해에 걸쳐 거듭 받은 직원들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시복시성운동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아 냉담했다. 103명이나 되는 성인이 있는데 또 복잡하게 복자 성인을 만드나 하며 남의 일로 여기는 안이한 생각도 가졌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를 읽고, 최양업 신부의 행적을 더 알고, 박정일 주교님의 강의도 들으면서 점차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소중한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진영읍에서 성당공동묘지 내에 있는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 묘소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참배자들은 3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한 순교자의 삶을 저마다 가슴에 새기며 진례로 떠났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진영에서와 달리, 진례에서는 인적이 없는 산속에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묘소를 찾느라고 긴장하며 길을 헤쳤다. 그러나 가파른 오솔길쯤이야 순교자의 정신을 새기며 거뜬히 올랐다.
소박한 하얀 나무 십자가가 하나 세워진 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 묘소 앞에서 우리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박대식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체포되어 김해관아에서 삼 일간 문초를 받은 뒤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다. 결국 그해 음력 8월 27일 참수 치명한다.
140여 년 전, 그 분의 증거가 우리의 신앙을 키웠고 우리를 이 자리에 서 있게 했음이 느껴져 가슴이 뜨거워졌다, 순교자들이 만든 방주에 우리가 태워져 안전하게 여기에 이르러 은혜로운 세상을 누리게 되었음에 감사했다.
우리더러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셨던 박 주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박대식 순교자 묘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125분 중에서 유일하게 처음 매장한 묘소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셨다. 그런 분의 자취를 우리 교구가 갖게 된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 것에 비추어 볼 때 순교자들이 순교한 시신마저도 오랜 세월 동안 이런저런 박해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박대식 순교자도 가족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시신을 인도받아 염습한 뒤 선산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였다. 할 수 없이 마을 뒷산인 茶谷(챗골) 유씨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다고 했다.
마산교구의 순교자 다섯 분은 모두 병인박해 이후에 순교하신 분들이긴 하지만, 124위 중 대부분이 기해박해 이전에 순교하신 것을 알았다. 103위 성인이 모두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이니 이전에 훨씬 먼저 순교하신 분들의 시성운동을 이제 추진하는 것이 송구스러울 뿐이다. 이분들이 103위 성인의 신앙의 뿌리이니 말이다.
각 교구에서 추진하던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노력은 1997년부터 10여 년이 넘도록 주교회의에서 통합추진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2009년 5월,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124위 시복 자료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한 상태이며 교황님의 최종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1984년 5월, 103위의 성인을 탄생시킨 한국교회는 참으로 뜨거웠다.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뜨거운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선조들의 굳은 믿음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의 삶으로 재현하려는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 더욱 뜨거워져야 한다. 온 교회에 성령의 은총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소리가 높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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