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국회에서 난투극을 벌이며 미디어법이 국회를 통과한 사건을 보고 어떤 유명인사가 “좀 더 세련되게 했어야지”라는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이 말은 ‘남이 보는 앞’이니 프로의 연기를 보여 주라는 것인지, 진실은 결국 보이는 세련됨에 있다는 뜻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모두 남에게 어떻게 보이고 평가받느냐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양심에 비추어 자신의 잘못을 남들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기란 어렵다. 어찌 보면 ‘세련되게 하라’는 주문은 ‘똑바로’하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이 ‘똑바로’는 자칫 침착과 인내의 모습을 보이려고 불편하고 어색한 진실을 애써 감추게 한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진실하게 경험하기보다 통제된 상황 속에 들어간다. 사유나 성찰의 과정 없는 ‘똑바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이나 이념이 되기도 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고뇌 없이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여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처럼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지만 겉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으니 ‘똑바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마태 23, 27-28) 그래서 ‘똑바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로 “네 탓”으로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합의하는 과정보다 드러난 결과를, 자신의 양심보다는 타인의 판단을, 행동에 대한 책임보다는 CCTV에 담긴 증거에 대한 집착은 바로 ‘똑바로’의 함정이다. 그러나 진실로 똑바로 살기 위하여 ‘솔직’하여야 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솔직함을 포기한 ‘똑바로’는 보이는 장식과 허상에 불과하다.
며칠 전 미국의 흑인교수 체포를 둘러싸고 오바마 대통령은 캠브리지 경찰의 행동을 비난했다. 이에 경찰대표가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단 한 명도 촛불시위 한 사람이 없었는데도 2시간 만에 백악관 기자실에 나타난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했다. 게다가 당사자인 경찰에게 직접 전화를 해 ‘맥주나 한잔’하자고 초대했다. 이는 정치인들이 통상적이고 관례적인 ‘유감’의 의미가 아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솔직한 ‘사과’로서의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이러한 행위를 ‘정치적인 쇼’라며 냉소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해도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것이 ‘용서’를 비는 일이다. 그것도 대통령이 만천하에 직접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어른이 아이에게, 사장이 사원에게 어영부영 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일개 경찰관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고 이 작은 목소리를 크게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아름답다.
‘솔직함’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나의 상처와 이웃의 아픔을 동시에 수용하는 용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통교하는 것이 ‘솔직함’이다. 솔직함이야말로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과의 진정한 소통의 열쇠가 된다. 성서에서 자신의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세리는 ‘똑바로’ 살지는 못했는지 모르지만 자신과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사람들 앞에서 보라는 듯 ‘저는 다른 사람과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하지도 음탕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세리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루가 18,9-14)하며 고백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신의 ‘똑바름’을 자랑하고 있지만 하느님이 선택한 올바른 사람은 바로 세리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우리나라가 참 복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파업, 북한과의 갈등, 4대강 사업 등 정치적인 문제와 얼기설기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와 같은 우리 사회는 편안하지가 않다. 서로 자신은 옳고 ‘똑바르다’고 외치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솔직함’으로 소통하여야 한다. 불편하고 통제할 수 없는 위선의 가면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내 탓’임을 인정하여야겠다.
미국 CNN방송은 오바마 대통령의 사과를 이렇게 평했다.
“그동안 사무실에 숨고 언론을 피하는 대통령과 의원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습니까? 오바마는 앞으로 걸어 나가 직접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미디어의 창을 헤집고 나와 마이크를 잡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보이는 똑바로’보다는 ‘보이지 않는 양심’에 비춘 ‘솔직함’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자신부터 ‘내 탓’을 인정하는 세리처럼 하느님과 이웃 앞에 용서를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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