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은 막 숨을 거두려는 듯 헉헉거리며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노인의 코앞까지 카메라를 들이대며 미친 듯이 셔터를 눌러댔다. 갑자기 노인의 입에서 누런 오물이 왈칵 솥구치며 카메라와 얼굴을 덮친다. 이승에서 던지는 마지막 구토였다. 그 순간까지도 셔터는 계속 터지고 있었다.
이미 오래된 얘기다. 임종순간을 담은 그 전무후무한 걸작 「부활-나인의 길」은 그렇게 탄생했다. 찰나의 승부. 순간포착을 위해 촌음을 다투는 렌즈의 세계.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 만큼은 그는 오로지 사진작가일 뿐이었다.
정신부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 웃음이 난다. 『신부가 죽어가는 이 앞에서 기도는 올리지 않고 사진만 찍어댔으니…. 카메라를 들지 않은 한 손엔 묵주를 들긴 했지만, 어디 그게 신부의 도리였겠습니까. 두고 속으로 참회할 뿐이지요』
가톨릭 사제이자 사진작가로, 최근엔 작가로서도 많은 이들에 각인되고 있는 정순재 신부(경북 용성본당 주임). 그는 『카메라는 나의 기도이자, 나의 강론』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성한 손가락 하나 없이 달 표면의 분화구처럼 군데군데 팬 손바닥으로 알약을 받아든 모습, 정강이부터 모두 잘려나가 신발이 필요없는 두 다리, 어깻죽지만 남은 팔에 고무줄을 동여매고 거기에 숟가락을 매달아 식사를 하는 나환자.
정신부가 보여주는 영상은 너무나 강렬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또 화려한 곳보다는 음침하고 소외된 곳, 응달의 사람들, 삶의 고난에 지치고 병든 군상들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는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응달의 소외된 사람들 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그들의 메시지를 양지로 가지고 나온다』는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다.
『20분 강론으로는 하고 싶은 얘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됐어요. 다른 방법을 찾던중 「보여주는 것」이 메시지 전달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겠다고 판단한 거지요. 「신부가 할 수 있는 얘기란 한계가 있지 않느냐」는 인식을 깨려 했습니다』
그는 입문 1년만에 개인전을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78년 3월 「부활-나인의 길」을 주제로 연 두 번째 개인전은 사진작가로서 그의 위상을 확실히 해준 계기였다. 이 작품을 위해 정신부는 1년동안 나환자들과 붙어 살며 친구가 되자고 했다. 79년에 연 제3회 사진전 「수녀 다미안」은 정신병동을 소재로 삼았다.
그의 작품 전시장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렸고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86년 그는 당시까지의 작품들을 모아 「인곡」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국내 사진작가 지망생뿐 아니라 외국의 비평가들로부터도 주문이 쇄도했다.
정신부의 사진 주제는 「인간」이다. 『누드나 아름다운 풍경들은 누구나 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지에서 웅크리고 사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내기란 어렵습니다. 내면적인 교류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표정만큼 좋은 테마가 없다』는 그의 사진속에는 그래서 늘 인간이 「악센트」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을 통해 부활을 포착하고 생의 어두운 단면을 통해 사랑과 진실을 포착하려 한다. 이런 삶의 진실들을 가장 가까이서 포착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는「노 플래시」 「노 파인더」 「노 트리밍」의 3가지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물론 망원렌즈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찍어보는 게 소원인데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의 모습과 죽음 직전에 참회하는 사람의 모습, 그게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요』
정신부가 어느땐가 초대의 글 삼아 전시장 입구에 써붙였던「쟁이의 독백」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호사한 응접실, 총총한 룸살롱, 혹은 내실 깊은 침방에 걸어놓을 것이 못되어 한 장도 팔리지 않는 배고픈 사진이올시다. 하물며 「영상미학(?)」 따위는 알 바 없습니다』
[98년 사진 영상의 해 기획 - 한국 가톨릭 사진작가들] 13. 사진집 「인곡」의 저자 정순재 신부
“카메라는 나의 기도이자 강론”
강렬하고 충격적인 영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메시지 전달
발행일1998-05-10 [제2101호,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