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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서울 목5동성당
⊙ 일시: 5월 16일 오전 9시 30분
⊙ 주관: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
원주교구 성지배론개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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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ㆍ한국 교회사 연구소ㆍ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ㆍ원주교구 성지배론개발위원회가 공동 주관한 제1회 2천년 대희년과 순교자 시성준비를 위한 교회사 심포지엄「선교의 자유와 「대박청래」문제」가 5월 16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목5동성당에서 개최됐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논문들의 요지이다.
□ 조선신자들의 대박청래운동에 대한 해외의 인식
- 윤민구 신부(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 주관)
이승훈 영세 이전부터 선교사 영입 추진
구베아 주교의 조선교회 관할권 야심으로
선교사와의 접촉 기회 원천적으로 봉쇄돼
■ 조선천주교회의 서양 선교사 영입운동
이승훈은 1784년 부친의 동의를 얻어 북경 북당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이승훈은 조선에 돌아가게 되면 즉시 임금에게 중국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왕실에 과학과 예술 등을 가르칠 수 있는 유럽사람들을 불러오자고 제의하겠다고 했다.
그라몽 신부는 일단 가톨릭이 조선 왕국에 자리잡기만 한다면 다시금 일본에 가톨릭을 전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그라몽 신부는 또 자신과 만난 조선 선비 중에는 재상(좌의정 정존겸으로 추정)도 끼어 있었고,
이들이 자기네 나라에 하루 빨리 유럽 사람들을 맞아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아주 열렬하게 표시해 조선 선교에 상당한 기대를 했다. 이처럼 이승훈 영세 이전부터 조선에서는 서양 선교사 영입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 선교사 요청에 대한 북경교회의 반응
조선교회의 선교사 파견 요청에 대한 북경 교회의 입장은 첫째 중국 정부와의 관계, 둘째 여유롭지 못한 북경교회의 상황, 셋째 윤유일의 조선교회 상황보고에 대한 의심, 넷째 조선 국경을 넘는데 따르는 위험과 어려움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당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1790년 9월경 북경에 있던 출신이 서로 다른 선교사들이 모임을 갖고 조선에 파견할 첫 선교사로 프란치스코회 크레션지아노 신부를 선출했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크레션지아노 신부 대신 마카오 출신 중국인 레메디오스 오 신부를 단독으로 결정했다. 구베아 주교가 그를 선정한 이유는 조선교회를 북경교구 관할권에 두고 자신의 조국인 포르투갈에 충성을 다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 내재돼 있었다.
구베아 주교는 또한 선교사 선정과 파견에 있어서도 조선교회와 서양 선교사와의 직접적인 접촉 기회를 막았고, 더 나아가 서양사절이 조선에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로 인해 조선 신자들이나 정조 임금이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기대, 즉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흥시키고,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불식시켜 정치적인 입장을 강화시키려는 기대도 철저히 배격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대박 청래를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서파의 쇄국적인 사고방식과 행위들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 황사영의 교회활동과 순교에 대한 연구
- 하성래 교수(수원 가톨릭대학교)
황사영의 생가는 '서울 아현동'…벽위편에 증명
신부 영입·신앙의 자유 위해 백서에 제시한 4대책중
마지막으로 「서양대박청래」제시…무력 사용 부정
■ 황사영의 가계와 탄생지
황사영의 생애에서 우선 바로잡아야할 것은 그의 생가가 '강화도' 가 아니라 '서울 아현동' 이라는 것이다. 이기경의 '벽위편' 은 "황사영은 서울 서부 아현방에서 태어났다"(胎生於西部阿峴 隨父母長養)고 적고 있다.
황사영의 아버지 황석범은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한림 등 중앙관서의 현직에 있었다. 이것은 그의 집안이 황사영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서울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화도 대묘동에 있는 집은 황사영의 생가가 아니라, 예헌의 종가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종가의 구거(舊居)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 황사영의 소명의식과 백서
황사영은 모든 인간은 천주님 안에서 한 형제라는 사상, 곧 '인간 평등 사상'을 몸소 깨닫고 실천하며 받아들였다. 여기에 그의 천주교관이 내포되어 있다.
황사영은 박해를 우리가 지은 죄의 벌로 파악, "죽은 이는 이미 목숨을 버려 주님을 증거 했지만, 나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마땅히 목숨을 바쳐 진리를 지켜야 한다" 는 교회 재건의 강한 소명의식을 가졌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신부 영입 및 신앙의 자유 획득책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그중 제1책은 책문을 통해 신부를 영입하는 방법이고, 제2책은 '도득황지'(圖得皇旨)로 북경 주교가 청나라 황제와 교섭, 조선 임금에게 천주교 신앙을 허용토록 명령해 달라는 것이다.
제3책은 '내복,감호'(內服, 監護)이며, 제4책은 '서양 대박 청래' 이다.
대박 청래는 황사영이 제시한 신부 영입 방법의 네 가지중 가장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으로 절대로 무력 강점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황사영은 왕권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집권층인 벽파를 분쇄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황사영은 임금에게 천주교는 사교가 아니라 유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는 요도(要道)임을 강조했다. 황사영은 외교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고 문호를 개방하려다가 실패한 선각자였다.
그는 반역자가 아니라 천주교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나아가 정신과 사회까지 개혁할 수 있는 바른 진리(道), 구세의 양약이라고 인식한 훌륭한 순교자였다.
□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과 양박청래에 대한 연구
- 차기진 박사(한국 교회사 연구소 연구실장)
천주교에 대한 위정자들의 판단 영향으로
북경교회 통해 성직자 영입, '洋舶' 등 추진
「洋舶=선교사=신앙의 자유」로 인식
주문모 신부가 「洋舶淸來」주도
조선교회에서 추진한 성직자 영입과 양박 청래 계획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시해야 할 문제는 첫째 당시 위정자들과 같이 무조건 천주교 신앙을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을 지양해야 하며, 위정자들의 의중이 깊이 내재된 문초 기록을 비평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박해의 위험에 처한 조선 신자들의 입장과 신앙 활동의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배교자의 진술과 순교자의 진술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서도 안된다. 세 번째로는 위정자들이 강조한 어느 부분적인 사실들을 가지고 이를 조선 교회 전체의 인식인 것처럼 일반화하려는 시도에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 성직자 영입 및 양박 청래 계획 수립과 추진
조선교회 지도층이 윤유일을 밀사로 북경에 파견한 목적은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데 있었다. 이후 밀사 파견과 양박 청래 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주문모 신부였다. 주 신부가 이 계획을 추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첫째 신부의 안전을 보장받아 선교의 자유를 얻고, 둘째 박해를 종식시켜 신앙의 자유를 얻으며, 셋째 양박(洋舶)을 타고 올 서양 선교사를 추가로 영입하려는 데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신자들은 중국 교회와 같은 상황을 동경하게 되어 "양박=선교사=신앙의 자유" 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또 지도층 신자들은 일장 판결과 같은 무력에 의한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 임금을 회유함으로써
우호조약을 체결, 자연스럽게 선교사를 영입하는 방법을 더 선호했다. 당시 신자들이 생각한 '서양 나라' 는 그저 막연히 '교황을 다스리는 서양 나라' 로 인식했다.
■ 조정의 인식과 양박 청래의 의미
당시 위정자들은 천주교 세력은 조선의 정체를 부정하고 서양의 외세에 의존, 나라를 전복하려는 무리라고 판단, 주문모 신부나 정약종의 깊은 신앙심조차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요 기존 국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이해했다.
바로 이것이 양자 사이에 놓여진 메울 수 없는 괴리였다. 당시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종교 운동의 일환에서 교회의 장상이 있는 북경 교회를 통해 성직자 영입과 양박 청래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조선 교회의 내적인 염원이었다.
□ 황사영 백서의 분석적 이해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황사영 세례명은 「알렉시오」(亞助叔·사학징의 권1, 74쪽)
무력사용해 신앙자유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노론 벽파 제거 목적으로 大舶淸來 계획
■ 황사영 세례명은 알렉시오
종래 황사영의 세례명은 알렉산델(亞肋山)로 알려져 왔으나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좥사학징의좦(권1, 74쪽)는 그의 세례명이 '알렉시오' (亞肋叔)로 표기하고 있다..
이와 함께 1808년 북경 주교로 임명된 수자 사라이바 주교의 '포르투갈 국왕에게 보낸 1813년 1월2일자 서한' , 조선 교회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1832년 12월14일자 서한' 과 김대건 신부가 1845년 3~4월에 작성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 에도 황사영의 세례명을 'Alexis' 또는 'Alexius'라고 표기하고 있다. .
이처럼 황사영의 세례명이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 '알렉산델' 로 잘못 적혀 있는데 이를 샤를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에 그대로 따라 표기한 데 원인이 있다.
■ 백서 분석
황사영 백서의 작성 배경은 초기 교회의 핵심 지도자였던 황사영 자신의 강한 '소명의식' 에 기인한다 .
그는 성교(聖敎)가 장차 이 나라에서 아주 끊어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위기 의식에서 백서를 작성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박해의 원인으로 정치,사회적인 측면과 함께 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자기 반성적인 측면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황사영과 백서가 비판받는 가장 큰 원인인 '대박청래' 는 바로 신앙을 획득하고자 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며, 결코 무력을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
황사영은 당시 정치를 전횡하고 있던 노론 벽파를 제거 대상으로 놓고, 중국의 감호책과 무력을 동반한 대박청래를 계획했다. 그러면서도 황사영 자신도 민족 구성원으로서 나름대로의 갈등이 있었고, 이에 자신이 제시한 방안들의 실천을 위해 행위 주체들에게 맡기는 신중함과 융통성을 보였다..
백서에 대해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과 함께, 종교적인 측면 즉 천주교 신자로서 황사영이 의도했던 바를 아울러 검토하는 것이 이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생각한다. .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일념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황사영을 통해 우리는 전환기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2천년 대희년과 순교자 시성준비를 위한 제1회 교회사 심포지엄
선교의 자유와 대박청래(大舶淸來) 문제
발행일1998-05-17 [제2102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