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상징인 명동대성당이 5월 29일로 축성 100주년을 맞았다. 신앙 자유의 상징으로, 일제와 독재에 맞서 우리 민족의 양심과 지성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로 100년을 살아온 명동대성당은 세월의 주름보다 시대의 고뇌와 민족적 아픔의 상처를 더 깊이 간직하고 있다.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성장해온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특집「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을 마련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도 아니요, 이 땅에 최초로 세워진 성당도 아니다. 그러나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 초기부터 신앙의 중심지요 교회의 심장부로자리매김해 왔다.
명동대성당이 이처럼 큰 위상을 유지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한 민족의 양심을 울리는 역동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순교자들의 힘에 기인한다. 순교자들은 진리와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미련없이 버린 분들이다. 물론 명동은 순교지가 아니다. 하지만 명동대성당을 지탱하는 밑바닥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명동대성당은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사제들이 탄생하고, 거룩한 미사가 붕헌되며, 순교자들의 대를 이을 새로운 신자들이 세례를 받고 새 사람으로 태여난다.
명동 지하성당에는 앰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 김성우, 최경환 성인과 순교자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2명의 무명 순교자 등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이들 순교자들의 순교 흔히 명동대성당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주추를 놓은 것이다.
복음의 전래와 신앙 공동체 형성
명동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자리한 것은 신앙이 전래된 초기 1785년 봄「명례방 사건」이 발생하면서 부터이다.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갖던 초기의 신자들이 체포된「명례방 사건」이후 명동 본당 지역에는 두드러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았지만 1845년 초 일시 귀국한 김대건 부제가 석정동(현 중구 소공동 을지로 1가 사이에 있던 마을)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틀 복사 이희창에게 관리토록 하고, 이후ㆍ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6개월간 석정동에 거처하면서 사목활동을 펼쳐 명동본당 지역은 다시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순교자현양운동의 중심
명동대성당이 완공된 후 첫 사업으로 실시한 것은 바로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이다. 이는 오늘날 명동대성당의 본질적 모습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명동대성당 프와넬 신부는 1899년 왜고개에서 발굴되어 용산신학교에 안치돼 있던 베르뇌 장 주교 등 7명의 순교자와 1882년 남포 서들골에서 발굴돼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블뤼 주교 등 4명의 유해를 성당지하 묘지로 안치했다.
이후 1925년 기해ㆍ병오박해 79순위 순교자가 사복되자 명동대성당은 복자 유해 거동 행사를 개최한뒤 복자 제대와 복자 성화를 장식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일 발발하고 교회탄압이 노골화되자 명동대성당은 같은 해「조선 천주교 순교자현양위원회」회를 결성했고, 해방이 되자 이듬해인 19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 미사와 성체 거동 행사를 가졌다.
한국동란 때 명동대성당은 교황사절 번 주교를 비롯한 유영근 신부, 정남규(요한), 김한수(노렌조) 등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1960년대에 들어서 명동대성당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쇄신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70~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과 짓밟힌 양심의 행방구로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순교 혼이 살아 역동하는 하느님 나라의 땅이다. 명동대성당이 대변하는 인권과 민주화, 사회 정의 실현은 모두 하느님 나라가 이땅에 도래하고 있고, 그 분의 말씀이 한반도 중심에 뿌리내려 성장하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전구가 있고, 하느님 말씀이 이땅에서 성장하는 한 교회와 우리 민족의 양심의 거울, 하느님 나라의 진원지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 나갈 것이다.
국가 사적 제258호 명동대성당은 1883년 6월부터 1889년 6월까지 6년간 30여 차례에 걸쳐 지금의 부지를 확보, 1887년 12월 정지작업을 시작,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가졌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6년 체결된 한불조약이 이듬해 비준을 거쳐 효력을 발생하자 명동대성당 건립 공사를 본격화했다. 그러자 외무 독판이던 조병빅이 이를 제지해 제1차「부지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다. 조병직은 성당 부지가 국유지임을 주장하며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의 수호신을 어지럽히는 일이므로 불법이라고 방해했다. 분쟁은 2년을 끌다거 플랑시 프랑스 공사 중재로 성담 대지 문건이 교회측으로 되돌아옴으로써 끝났다.
1898년 종탑 45m, 길이 69m, 너비 28m의 삼연 고딕 양식 명동대성당이 완공, 성령강림대축일인 5월 29일 한국교회의 주보인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본당 주보로 축성식을 가졌다.
◆ 명동본당 주임 장덕필 신부
“한국 교회와 사회 최대 상징적 존재?
『명동성당이 100주년을 맞이한 이시대에 주임신부를 맡게 돼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지나온 100년이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신앙의 유산을 발전시키고 성숙시켜 나가는데 귀중한 몫을 해 나갈 것입니다』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시대의 아픔을 껴안은채 민주화의 불꽃을 피어 올렸던 명동대성당. 100주년을 맞는 명동대성당의 주임으로 재직하고 있는 장덕필(니꼴라오) 신부는 명동성당이 앞으로도 선교의 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양심의 빛으로서 또 정의의기수로서 영원히 빛날 수 있길 기원했다.
특히 장덕필 신부는 『명동성당을 두고 스스로 민주화의 성역이라고 주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성역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말하고 『그만큼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 가장 큰 상징적 존재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동시에 장덕필 신부는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구장이신 김추기경의 복음적 실천과 진취적이며 예언적인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며 유형의 명동성당의 무형의 가치를 덧씌워준 김추기경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교론적인 입장에서만의 모습에서 탈피, 열린교회로서 이 사회와 깊숙이 호흡하는 친교의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장신부는 구체적으로 100주년 기념관 건립을 통한 사목정보센터 역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폭 확대 등을 시행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히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기도를 요청했다.
◆ 명동본당 주임 장덕필 신부
한국 교회와 사회 최대 상징적 존재
명동성당이 100주년을 맞이한 이시대에 주임신부를 맡게 돼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지나온 100년이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신앙의 유산을 발전시키고 성숙시켜 나가는데 귀중한 몫을 해 나갈 것입니다.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시대의 아픔을 껴안은채 민주화의 불꽃을 피어 올렸던 명동대성당. 100주년을 맞는 명동대성당의 주임으로 재직하고 있는 장덕필 (니꼴라오)신부는 명동성당이 앞으로도 선교의 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양심의 빛으로서 또 정의의 기수로서 영원히 빛날 수 있길 기원했다.
특히 장덕필 신부는 명동성당을 두고 스스로 민주화의 성역이라고 주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성역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말하고 그만큼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 가장 큰 상징적 존재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동시에 장덕필 신부는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구장이신 김추기경의 복음적 실천과 진취적이며 예언적인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유형의 명동성당에 무형의 가치를 덧씌워준 김추기경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교론적인 입장에서만의 모습에서 탈피, 열린교회로서 이 사회와 깊숙이 호흡하는 친교의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장신부는 구체적으로 100주년 기념관 건립을 통한 사목정보센터 역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폭 확대 등을 시행해 나가고자 한다고 밝히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기도를 요청했다.
[특집]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상)
한국교회 순교신심의 초석 다져
성당 완공후 첫 사업 “순교자 시복운동”
일제시대 현양운동…6·25 순교자 탄생
종탑45ㆍ길이69ㆍ너비28m의 고딕 양식
1898년 5월 29일 축성-사적 제258호
발행일1998-05-24 [제2103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