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후 한국천주교회가 맞부딪친 「현대사회와 교회의 역할」이라는 명제에 명동대성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동성당이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교회쇄신의 고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평신도 사도직을 체계화하고 사회안에서의 교회를 중시해 나가면서 교회의 내적 쇄신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명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가면서 한국 교회는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유신 체제가 시작되면서 이 운동은 단지 사회 운동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항쟁으로 변모하였다.
교회내적 쇄신운동
명동본당은 김수환 대주교가 제11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경축행사,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를 창립한 데 이어 이듬해 5월 김수환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 축하행사 등으로 새 시대를 열었다.
1970년 2월에는 자치위원회를 평신도사도직협의회로 개편함으로써 본당 조직 체계를 다졌으며, 같은 해 12월에 월간신문 「가톨릭명동」을 창간했다. 1971년 종각의 탑시계를 수리하고 1년후 「명동대성당 복원 보수위원회」을 구성한 뒤 6월부터 복원공사에 착수, 1973년 말까지 대성당 지붕과 벽체 보수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때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사목위원회로 개편함과 동시에 초본당적으로 구성하는 한편 민주화운동과 시국 기도회를 개최하였고, 사목위원회 피정, 공의회 문헌을 통한 평신도 재교육과 단체 피정 등을 통해 내실을 다졌다.
특히 경갑룡 보좌주교가 주교임명 이듬해인 1978년 3월부터 15대 본당주임을 겸하며 명동본당은 발전적인 사목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우선 신입교우 수가 증가하는 것을 계기로 매월 예비자 교리반을 편성하였으며, 강의실을 증설하기 위해 사제관을 교육관으로 개조함과 동시에 1979년에는 현재의 사제관과 수녀원, 소성당, 사무실을 신축하고 가톨릭 출판사를 중림동으로 이전했다.
또 1982년에는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복원하는 동시에 지붕 동판 보수작업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성당 보존ㆍ보수 사업계획이 입안되었다. 아울러 경갑룡 주교는 1980년부터 사제 당직 근무제를 신설하여 신자들의 상담ㆍ고백ㆍ축성 등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82년 8월 경갑룡 주교가 대전교구장으로 이임한 후 명동본당은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 맞추어 대성당 보수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했으며 1982년 12월8일 주보축일을 맞아 본당설립 100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그리고 1983년의 특별성년(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성업, 1950주년)을 맞이하여 순례 성당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화해와 쇄신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동시에 본당 내적으로는 명동의 복음 200년사 자료 발간, 103위 복자 순회기도회와 성인 시성식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또 1985년에는 현재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7월 13일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1986년에 들어서는 민주헌법을 위한 개헌 서명운동을 본당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6ㆍ10 명동성당 농성과 촛불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기간 중 본당에서는 한편으로 본래의 사목적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고심해야만 하였다. 명동본당이 초본당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회 안에서의 교회와 본당사목이라는 점을 절충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상설 고백소를 설치하고 1989년에는 직장인 미사를 신설하였다.
1991년 1월부터 7월까지 대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를 구성한 명동본당은 교구와 본당이 함께 100주년 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다음, 1995년에는 100주년 기념관 설계 경기를 개최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민주화 운동의 산실
한국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은 70년대 이후 시대의 요구와 아픔, 민중의 눈물을 품어 안으며 이 나라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1970년 대전에서 창립된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의 활동이 점차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됐으며 1975년부터 부정 부패와 사회 부조리 척결, 정치에 의한 인권유린 고발 등에 앞장서면서 2월 6일 명동대성당에서 전국적인 인권 회복기도회가 개최됐다. 이든 해인 1976년 「3ㆍ1 명동사건」 즉 「민주구국 선언문 사건」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 현 김대중 대통령 등 수많은 인사들이 구속되었고 이때부터 명동성당은 민주항쟁의 구심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74년에 발족된 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의 활동, 평신도운동, 노동자ㆍ농민 운동 또한 대부분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74년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사건, 1977년의 함평 농민회 사건, 1978년의 동일방직 사건, 1979년의 안동 농민회 사건 등이 줄을 이었다. 이어 1980년의 광주 민주화 운동과 이후 박종철군 고문치사 폭로 사건, 「6ㆍ10집회」등 80년대 내내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 되였다. 더구나 90년대에도 이어진 명동성당에서의 각종 집회 가운데 170일 동안 계속된 농성으로 명동성당 최장기 농성으로 기록된 95년 「5ㆍ18 진상규명 촉구집회」를 비롯 「성역논쟁」을 불러 일으킨 95년 6월 한국통신 노조의 농성때는 2천5백여 명이 성당 구내에서 「노동악법 철폐」를 외치는 가운데 성당이 공권력에 짓밟히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오는 동안 명동본당은 교회안에서는 한국천주교회의 중심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는 천주교회의 상징이 되어왔다.
◆ 명동본당 52년 신자 최병원 할아버지
“「명동」의 저력이 민족 염원 통일 앞당겼으면…”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인 명동대성당에서 반세기 넘게 신앙생활을 해온 최병원(요한ㆍ84) 할아버지는『100주년을 계기로 복음화의 물결이 온 땅에 메아리 쳤으면 한다』며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명동성당과 함께 한 52년의 세월. 그는 그동안 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크고 작은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지켜봤다.
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 운동의 중심지, 70~80년대 민주화 운동 등. 최할아버지는 특히 민주화 운동당시 본당 총회장으로 큰 역할을 수행했다. 정부와 시위대 사이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뿐 아니라 정치사적으로도 그 중심지에 있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처음으로 성당에서 우리말로 미사를 드릴 땐 가슴이 벅차더군요. 또 70~80년대 명동성당이 시위대들의 피난처로 이용될 땐 정부와 시위대 사이에서 맘고생이 무척 심했습니다』
아침마다 동작동 국립묘지를 산책하는 최병원 할아버지. 그는 산책동안 명동성당이 살아 있는 성역으로,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
『명동성당이 앞으로도 교회와 민족의 양심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켜나가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힘을 바탕으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하루 빨리 이끌어 냈으면 좋겠어요』
[특집] 명동대성당 축성 100주년 (하)
교회 쇄신ㆍ사회 정의ㆍ민주화 주도
70년 평협 설립 조직 체계 다져
83년 화해와 쇄신운동 전개
「3ㆍ1 사건」 「6ㆍ10 집회」 주무대
「한통 노조 농성」때 공권력 난입
발행일1998-05-31 [제2104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