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와 김추기경
김수환추기경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던 한국사회를 밝혀온 큰 햇불이었다.
유신이후 암울했던 시대, 민주화의 촛불을 켜들고 인간존엄과 인간화 실현에 앞장서 왔던 김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족적을 남기며 때론 「용기있는 발언」으로 때론 「중용의 침묵」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김추기경은 한국 가톨릭의 최고 성직자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시대의 양심, 그 자체였으며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시대의 물꼬를 트는 방향타가 돼 왔던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꼽을 때도 김추기경은 항상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적 신망과 기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그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곧 김수환추기경이 한국의 유일한 추기경이라는 신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적 양심의 대변자로서 국민정서속에 자리잡은 김추기경은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의 피난처로서의 상징성과 함께 시대의 메신저 역할로서 사회적 지침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교구장 착좌식때 강조한 각성, 쇄신, 현실참여를 실천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 왔던 김추기경은 지난 77년 5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함께 인권 회복에 공헌한 공로로 미국 노틀담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비롯 총 8차례에 걸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지대하다.
김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 울타리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로서만이 아니라 복음의 실천을 위한 정치 사회적 토양 마련과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에 바탕을 둔 인간화, 인간성 회복 등을 위해 노력해온 사목자였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한 인권과 공해등 제반문제에 대한 추기경의 관심은 1968년 삼도직물 사건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 김추기경은 성명서를 통해 교회의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의 정당성을 발표하고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공동성명을 발표한바 있다.
이 성명서는 한국교회가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발표한 최초의 성명서인 동시에 사회정의와 인권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강력한 참여를 입증하는 최초의 사례였다.
70년대 박정희대통령의 3선개헌과 유신헌법 선포. 긴급조치 등으로 상징되는 독재와 정보정치, 부정부패 등이 난무할 때 김추기경은 각종 메시지와 강론등을 통해 시대의 어둠에 줄기차게 빛을 비추어 왔다.
71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72년에는 평화의 날을 맞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교회 내외에 선포, 불의와 부정부패, 부조리, 인권탄압, 독재등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74년 지학순주교의 구속사태를 시작으로 76년 명동 3.1절 기도회, 78년의 전주교구 7.18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달아 구속되는 등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자 각종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쉴새없이 자유언론과 인권. 그리고 민주회복을 강조, 교회는 물론 국민대다수가 정신적 일체감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김추기경은 정국이 혼미를 거듭할 때 균형있는 비판과 적절한 정국 타개 방법을 제시하여 정치권에 커다란 교훈을 주었는가 하면 경제계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가는 노사분규, 교회 나름대로 깊숙이 관여했던 도시빈민문제, 농촌문제등에 대해 공동체의식을 강조, 나눔을 통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나가기도 했다.
80년대의 사회참여는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와중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한 것으로 시작된다.
그 뒤 부산의 미 문화원 사건, 외국농수축산물 수입, KBS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언론통제 등 군부독재와 그로 인해 빚어진 구조적인 사회문제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여 이땅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86년의 개헌, 민주화운동, 학원소요, 계층간 격차, 근로현장의 문제등 사회의 여러 대립현상이 한꺼번에 분출되자 입장을 달리하는 사회 세력간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의 처방을 모색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86년 인권회복 미사 강론을 통해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인권보장, 민주화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과 우리 자신의 회개와 정치지도자의 회개를 강조하였다.
90년대 우리사회가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 빈부간 노사간 갈등이 크게 노출되고 있을 즈음에는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가치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직과 성실」을 강조, 우리 자신이 진정 변화되어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무엇보다 김추기경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정의와 진실을 가려주고 옳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양심의 건재를 증언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소박하고 소탈한 외모와 성품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위엄이 있어 보였던 김추기경. 그런 김추기경이었기에 우리나라가 가톨릭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신뢰는 계속 높아질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혀 왔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김추기경은 한국교회의 정신적 지주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토양으로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해 갈 수 있을 것이다.
◆ 내가 만나 본 김수환 추기경 - 이은윤(중앙일보 종교전문 대기자)
“권위주의적인 태도와는 다른 거물다운 풍모 지녀”
80년대 초의 일이다. 어느날 우연히 김수환추기경이 승용차를 피아트에서 스텔라로 바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기자 감각을 발동, 즉각 서울교구청으로 달려가 마침 주차장에 서있던 김추기경의 스텔라 승용차 사진을 찍어 화제 기사로 보도했다. 당시로서는 김추기경의 승용차 교체는 성직자의 가난(청빈)과 겸손을 상징하는 훌륭한 뉴스였다. 왜냐하면 그 무렵 불교 개신교의 상당수 성직자들이 정부 장관급이나 타는 피아트ㆍ푸조를 타고 다녀 종교계의 물량적 팽창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많은 사람들로 부터 곱지않은 눈총을 받는 터였다.
따라서 대형차를 중형차로 바꾼 김추기경의 승용차 교체는 낮은 곳으로 임하는 성직자의 자세를 보여주면서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주변 취재를 해보니 멀쩡한 승용차를 의도적으로 한 등급 낮추어 교체했단다. 교체 배경은 로마 가톨릭의 최고 교직이며 한국 천주교에 단 한명 뿐인 추기경이 중형차를 탐으로써 그 아래의 대주교ㆍ주교ㆍ신부들이 감히 대형차를 갖지 않는 성직자의 겸손을 솔선수범하려는 것이었다.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래서 기사에 다른 종교 성직자 들의 대형 승용차 애용을 김추기경에 빗대 따끔히 비판했다. 김추기경은 한국의 70년대 민권운동과 민주화 투쟁의 정신적 지주였기에 그를 한국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로 손꼽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장관급이 타는 피아트를 탄다고 해서 눈살을 찌푸릴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승용차 등급을 낮추는 「겸손」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김추기경을 내심 존경해왔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때였다. 급박한 시국인지라 김추기경의 사태 관련 발언에 내외신들이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얼마쯤 지나 김추경이 기자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기자가 좀 까다로운 질문을 했더니 『저 친구 혹시 정보기관서 온 사람 아니냐』고 조크를 했다. 기자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공격적인 질문에 대해 역공으로 이같은 조크를 던졌다. 물론 많은 경륜이 쌓였겠지만 김추경의 대언론 관계는 아주 노련했다. 관훈클럽 토론에도 여러 차례 초청됐고 기자도 직접 질문자로 나간 일이 있는데 늘 유머로 뜨거운 토론분위기를 능란하게 이끌어 나갔다. 날카로운 질문에는 『내 꼭 그질문이 나올줄 알고 준비를 했다』고 받아넘기며 변명이나 꾸밈없이 진솔한 답변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민감한 정치 사회문제들에 대해 국민의 바람을 대변하는 「한 마디」를 과감히 피력, 시대를 앞서 이끄는 성직자의 예언자적 사명에 충실했다.
기자는 1990년 2월 남미 해방신학의 지도자중 한 사람인 브라질 상파울루교구장 아른츠추기경을 취재차 만난 일이 있다. 그 때 온화하고 자상하며 겸손한 아른츠추기경의 비권위적인 자세에 큰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수환추기경과 아른츠추기경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면서 세계적인 거물 성직자들에게서 느끼는 푸근함과 친근감을 새삼 만끽했다.
일부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는 전혀 다르면서도 거물다운 풍모를 보여주는 김추기경의 어른스러움은 확실히 한국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부디 한국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 더 많은 영적 구원과 사회구원을 계속 앞서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국을 움직인 거인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 30주년 (하)
「용기있는 발언」「중용의 침묵」으로 한국 교회·사회 밝혀 온 큰 횃불
소외·억압받는 이의 피난처로서 혼탁한 시대 「양심 대변자」로 매김
30년전 교구장 착좌식때 강조한 「각성」「쇄신」「현실참여」실천위해 노력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직ㆍ성실 강조 나부터 생각ㆍ마음ㆍ삶 바꿀 것 촉구
항상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
발행일1998-05-31 [제2104호,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