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은 바로 삭막한 이 사회의 외딴섬으로 변해 버린지 오래다.
경제난이 시작된 초기에는 하루 평균 5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하루 평균 2천여 명으로 서울역 주변의 노숙자는 급격하게 늘고 있다.
서울역 지하도에 가면 IMF체제를 견디어 내는 우리시대의 쓸쓸한 영상들을 만나게 된다.
몇 개월 전만 해도 한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요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던 수많은 노숙자들이 사회적 망명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곳. 서울역은 바로 삭막한 이 사회의 외딴섬으로 변해 버린지 오래다.
경제난이 시작된 초기에는 하루 평균 500여명에 불과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하루 평균 2천여 명으로 서울역 주변의 노숙자는 급격하게 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약 50~60여명이 서울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냈지만 요즘 들어 약 300여명으로 늘어났다』는 서울역 경비직원의 지적처럼 서울역은 이미 IMF한파의 바로미터라고 할 정도로 심각해진 사회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가슴 아픈 일은 매일 밤마다 양복과 같은 말쑥한 차림의 복장을 한 중년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는 점.
나라살림을 거덜 낸 실정의 희생양이 된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회사부도, 실직 등으로 고민하다 서울역 부근을 배회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부산에서 중소기업을 하다 부도를 냈던 이 경우(53세)씨는 날마다 찾아오는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 2월말부터 서울역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이씨는 『처음에는 죽기 위해 시간을 벌자는 심정으로 서울역 노숙생활을 시작했으나 이제는 이 생활이 편해졌다』고 말할 정도로 삶에 대한 애착도 노숙생활에 굳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염치불구하고 행려자 식당을 찾아 다녀야 하고 잠을 자기 위해서는 아무 곳에나 라면박스 하나만 깔고 자야 하는 생활이 지속되면서 몸도 마음도 정상에서 차츰 이탈해 가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서울역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는 박재봉(46세)씨는 마산에서 건축공사장 도배기술자로 일했으나 일거리가 없어지면서 노숙자로 전락한 케이스.
건강이 좋지 않아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기도원에 있었던 박씨는 5년 만에 나와 건축일을 시작했지만 경기가 뿌리째 흔들리는 바람에 졸지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다.
그러나 박씨는 요즘도 인근의 남대문시장에서 새벽마다 열리는 인력시장에 매일 들르곤 한다. 혹 일자리라도 있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찾아 가지만 매번 허탕치고 무거운 발길을 되돌리곤 한다.
원래 가족은 없으나 마산에 형님가족이 살고 있다는 박씨는 마땅히 찾아갈 곳도 없고 돈도 없고 해서 서울역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고 식사는 작은 소망의 집과 같은 천주교 행려자식당을 전전하며 대충 때우고 있다. 혹시 감기라도 들면 성가복지병원을 찾아 약을 타 오는 것이 전부다.
노숙자생활 6개월째로 접어든 박씨의 더욱 큰 걱정거리는 이러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돼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현재 서울역에는 박씨와 같은 노숙자들을 위해 1층 대합실 한쪽을 24시간 개방하고 있을 만큼 노숙자들로 만원을 이룬다.
물론 서울역 역무원들도 이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매일 밤 술 취한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뒹굴며 자고 있는 사람 등 승객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 주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범죄예방 차원에서만 신경을 쓸 뿐 그냥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서울역 주변의 수많은 노숙자 중에는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과 애착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부도를 낸 전직 중소기업 사장이었다는 조천우(44세)씨의 경우 『자신이 부도를 낸 것은 나라경제를 잘못 이끈 정부의 책임』이라고 강변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다. 회사를 운영했던 자신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지만 조씨는 하청업체로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조씨는 현재 정부가 벌이고 있는 노숙자문제 해결방식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일시적인 구호책에 불과한 구호소 설치와 식사제공 등의 방식으로는 노숙자문제를 근원적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이 조씨의 설명이다.
서울역지하도에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 주 5일간 매일 밤 11시경 나타나 약 200여명의 노숙자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사라지는 어느 한 시민의 지적처럼 노숙자들에게는 『라면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정신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실직한 아버지들의 모임」이 실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자살 충동을 느낀 사람이 29%, 불면증에 시달린 경험자가 81%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실직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거리로 뛰쳐나와 노숙자가 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이미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해야 하겠다는 의욕조차 상실한 경우가 많다.
노숙자들의 경우 정서는 물론 기존의 윤리나 도덕심, 가치판단, 의욕 등을 상실한지 오래다. 결국 이들 노숙자들이 많다는 것은 사회의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알려지고 있는 정신적 황폐화를 가속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많은 경제전문가들과 복지부 관계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울역 등지에서 노숙하며 방랑하는 실직자들이 크게 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중소기업가와 건설기능인력, 음식점 종사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앞으로 기업의 정리해고가 본격화될 경우 실직한 화이트칼라 등도 상당수 노숙자로 전락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말처럼 실직자들에게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돕는 노력, 그것은 곧 교회의 몫일 수밖에 없다.
가정과 직장, 본당을 통해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것만큼 큰 힘은 없을 것이다. 당장은 실직의 고통에서 거리를 헤매고 있지만 자신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웃이 있음을 발견할 때 그들은 재생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곧 실직자」라는 인식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우리 사회에 만연된 실직의 고통들은 점차 엷어져 갈 것이다.
[르포] 노숙자들의 숙소 서울역 지하도
정서ㆍ윤리 의식ㆍ의욕 상실
알코올 중독 위험에 빠지기도
교회, 따뜻한 이웃으로 다가서야
매일 2000여명의 실직자들
잠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끼니는 행려자 식당서 해결
발행일1998-06-07 [제2105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