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보다 정확한 답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우리는 『보았다고 다 본 것이 아니요 못 보았다고 안본 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대신하기로 했다. 불가(佛家)에서 쓰는 선(禪)문답 같기도 한 이 말은 내가, 우리 일행이, 북녘 땅을 밟은 후 거의 공통으로 가져야 했던 느낌이었다.
사실 북쪽을 어떤 명분으로든 다녀온 사람들은 언론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 조금은 답답하기 만했던 이들의 선택은 어찌 보면 북녘을 다녀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이 선택은 우리가 바로 한 겨레, 한 핏줄이라는 원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지금 내가 시도하는 북한 방문기도 사실 이 원칙에서 보면 어긋나는 선택일 수도 있다. 때문에 너무 많이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지금 행하고 있는 북녘 동포와의 나눔 정신에 비춰본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북녘 사정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받은 「선물」, 북한 방문이라는 선물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누어야만 한다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줍잖은 내용으로 자칫하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교님과 우리 일행의 도움을 받아 북녘땅 이야기를 조금만 함께 나누고자 한다.
아직도 그들과의 나눔에 있어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도 마음 저편 한구석에 미움의 그늘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 그쪽 「인민」의 대다수는 미움의 대상도 주저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선택일 수도 있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들 인민 대다수는 정말 우리의 손길이, 우리의 사랑이 당장 필요한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보다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기도발」이 효험 있기를…
우리 일행에게 있어 진정 정답인 이 결론은 5월 15일 평양 「순안공항」을 내려다보면서 일찌감치 결정이 나 버렸다. 평양을 중심으로 벌거숭이의 산기슭들과 텅 빈 고속도로들은 약간의 흥분 속에 「미지의 세계」와 상봉을 기다리며 설레이던 우리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것이야 말로 실제상황이구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예비지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반성하면서 화살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근심하는 이의 위로자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중국 대련공항에서 11시30분발 평양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인솔자 최창무 주교님은 기도를 주재하시면서 이 같은 전구를 함께 청하셨다. 한명씩 주교님으로부터 축복과 안수를 받으며 우리는 진정 우리의 「기도발」이 평양 땅에서 효험을 발휘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조용한 「순안공항」
평양 「순안공항」은 자그마했다. 그리고 너무나 조용했다. 거의 10년 전 「중국」을 「중공」이라 부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던 당시, 처음 가보았던 「북경공항」이 갑자기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우리 일행 5명을 포함해서 모두 8명이 타고 내렸으니 공항은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기만한 공항에 조선천주교인 협회 중앙위원회 장재철위원장 일행이 트랩 아래까지 영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만남이란 항상 기쁘고 유쾌한 것. 서너 번째가 된 우리 만남은 우선 반가움을 앞세우게 했고 우리는 진심어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공항 저편 한 켠에서 우리보다 나흘 먼저 「선발대」로 평양에 들어간 오태순, 이기헌 신부가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주교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손을 하늘로 쳐들고 마구 흔들어 대는 두 신부님의 모습은 마치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렇게 우리의 북녘 방문은 시작됐고 평양과 평양근교 력포, 황해북도 곡산, 강원도 땅 원산, 통천을 거쳐 금강산이 있는 고성에까지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우리 남쪽 사람들이 쉽사리 갈 수 없는 곳, 그 곳에 대한 호기심은 우리가 떠나기 전부터 높은 강도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에 대한 정답은 이미 기대를 건 당사자가 가지고 있었다. 단지 확인이 필요할 뿐이었다. 『가 보니 정말이더냐. 뭘 보았느냐. 그래 정말 굶더냐. 보여주는 것만 보진 않았는가. 계속 도와줄 필요가 있는가…』 거의 똑같은 의문과 질문에 대한 우리 일행의 답은 오직 하나 『인도적 차원의 나눔은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또 하나 있었다. 『백문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하고 싶은 이야기 감추고 싶은 이야기] 이윤자 편집국장 북한 방문기 하나 : 안보고 믿는 것이…
「인민」 대다수는 절박한 처지였다
발행일1998-06-14 [제2106호,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