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성장기와 사목활동기를 보면 국내 일정 지역에 한정돼 있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특히 김 신부의 주요 성장지와 사목활동지는 용인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골배마실, 단내, 동산리 일대로 최근 도보 성지 순례 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한국인 첫 사제로서 6개월이라는 짧은 사목활동을 하다 선교사 영입을 위한 해로를 개척하던 중 체포돼 순교한 김대건 신부. 7월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아 김 신부의 국내 활동지역을 정리해 보았다.
국내 입국로
1845년 8월31일 상해 출발후 한달만에 제주도 표착
보름만에 나바위에 도착, 한국인 신부로 조선에 첫 발
감시망 피해 위험한 수로 택해…갖은 고초 겪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서울로…사목활동 시작
1845년 8월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조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를 출발했던 김대건 신부는 9월28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보름여만인 10월12일 충남 강경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한국인 신부로서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서한에서 제주도로 표류한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증언했다. 라파엘호가 서울을 향해 항해를 하기 얼마전 영국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서남해안에 나타나 조정에서 비상이 걸려 서울 주변을 감시하며 강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세밀하고 엄하게 조사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남도 북쪽의 내륙 60리 되는 조그만 강을 끼고 있는 강경 나바위를 입국 루트로 정하고 다도해를 가로질러 가는 위험한 수로를 택했다.
페레올 주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물이 새어 들어와 바다에 겨우 떠 있는 배를 타고 해치워야하는 위험한 뱃길에 끊임없이 경계를 하면서 보름간 항해를 하였습니다. 항해중 우리는 줄곧 맞바람을 안았었고 해류는 급하고 암초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바위에 부딪혔습니다. 가끔 모래에 걸리기도 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서해안의 뱃길에 익숙지 않아 자주 만(灣)에 갇혀 종선을 뭍으로 보내 길을 물어서 빠져나오는 등 혼이 달아날 정도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보름간의 항해 끝에 강경 황산포구 인근 외딴 곳에 닻을 내린 김대건 신부 일행은 사람을 보내 신자들에게 도착을 알렸다. 밤이 깊자 마중 나온 신자 2명의 안내로 뭍에 오른 김대건 신부 일행은 특히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2달 여만에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미리 신자들이 준비해온 상복을 입고 배에서 내려온 서양 선교사들과 김대건 신부 일행은 신속하게 안내자의 집으로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는 입국소식을 이날밤 편지로 작성, 보고했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서울로 향했다. 서울이 선교의 중심지요 가장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사제들이 11월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을 유추해 볼 때 강경에서 서울까지는 은신하지 않고 대담하게 상경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사목활동 거점
은이공소 중심으로 주로 밤에 성무활동
동산리ㆍ단내ㆍ골배마실로 다니며 사목
신자들 전송 극구 만류…안전에 각별
페레올 주교의 명에 의해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로 떠나기전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1월부터 1846년 4월13일까지 6개월간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펼쳤다.
순교자 정은(바오로)의 후손 고 정원진 신부가 지은 「정씨가사」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는 오늘날 이천 단내성지와 어농리 성지 가운데 위치한 동산리(동산밑)에서 단내, 오방이, 골배마실, 은이로 순회하면서 사목했다.
「정씨가사」에 의하면 김대건신부의 성무활동은 항상 밤에만 이루어졌다. 김신부는 동산밑 동네에서 10리가 채 못되는 단내로 미사짐도 없이 복사만 데리고 와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다시 골매마실로 가 성사를 주고 은이로 가면 날이 밝았다고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김대건 신부는 은이에서 유숙하며 단내 동산밑까지 거의 일직선상의 사목 루트를 구축하고 용인 일대에서 성무활동을 편 것으로 드러난다.
김대건 신부는 교우촌에서 복사를 시켜 작은 목소리로 『김신부님께서 성사 주시러 오셨으니 주저 말고 나오시오』하고 알리면 신자들은 신부를 영접해 곧 고해성사를 받으려 예비하는 중 벽에 종이 한 장을 붙이고 고상을 그 위에 모셔 걸고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신 후 떠났다.
김 신부는 신자들이 전송하려 하면 진심껏 만류하면서 『내가 이렇게 밤을 타서 교우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내 조심도 하며, 교우들에 대한 외인 이목(耳目)도 조심하기 위하여 이렇게 밤에 다니는 것이니 부디 나오지 말고 집안에 조용히 있어라』고 권면했다고 한다.
서해안 해상 개척로 및 체포 압송로
입국 위한 서해 해로 개척하다 체포돼
40여차례 문초…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
김대건 신부는 1846년 5월14일 선교사 입국을 위한 서해 해로 개척을 위해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 25일 연평도에 도착했고, 27일 순위도 등산진을 거쳐 5월 29일 백령도에 도착했다.
백령도에 도착한 김 신부는 중국 어선과 접촉, 서한을 전한 뒤 6월1일 순위도 등산진으로 귀환하였다가 6월5일 체포됐다. 김대건 신부가 1846년 8월26일 감옥 안에서 작성한 스무 번째 서한은 마포에서 배로 연평도를 거쳐 순위도, 소강, 마합, 터진목, 소청, 대청을 돌아 백령도에 정박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6월10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돼 고문을 당한 후 6월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40여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았으며 9월16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특집 - 김대건 신부 순교자 대축일] 성 김대건 신부 사목 발자취를 찾아서
발행일1998-07-05 [제2109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