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논란을 일으켰던 황사영(알렉시오) 탄생지에 관한 논쟁을 종식시킬 자료 검증 논문을 한국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가 내놓아 황사영 탄생지 논쟁의 새 국면을 맞았다.
차기진 박사는 「황사영(알렉시오)의 탄생지에 관한 소고」에서 하성래 교수(수원가톨릭대)가 주장하는 「서울 아현방 탄생지설」과 황용호 교수(동국대)와 한종호 인천교구 성지 개발위원이 제시한 「강화도 생가설」중 하교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음은 차기진 박사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의뢰로 하성래 교수와 황용호 교수, 한종호 위원이 제시한 주장과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증해 내린 결론을 요약한 내용이다.
황준 이래 황사영까지 4대는 강화도와는 관련 없다” 판단
「강화부지」 「달레」의 기록은 오히려 강화 생가설 부정하는 자료
□ 황사영 생가 연구 왜 중요한가
황사영이 순교자라고 할 때 그 탄생지는 바로 교회 사적지가 되기 때문에 생가 연구는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시성절차법에 따라 황사영이 시복 대상자로 선택될 때 「주교나 그 대리인은 예비심사를 마치기 전에 「하느님의 종」의 묘지, 살았던 침실이나 죽었던 침실이 있다면 그곳을, 또 그의 영예를 위하여 경배 표시가 표현된 곳이 있다면 그곳을 성실히 검증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로든 황사영 생가터를 검증해야 한다.
□ 생가설의 배경과 의론
하성래 교수의 「아현 생가설」은 이기경 「벽위편」에 기록돼 있는 「서부 아현 태생」(胎生於西部阿峴)에 근거한다. 반면 「강화 탄생설」은 1932년 간행된 「속수증보 강도지」(續修增補 江都誌), 「창원황씨족보」 회산공파보와 구전을 기초로 황사영의 후손 황우세씨가 1981년에 『강화도 대묘동 창원 황씨 사당 앞자리가 바로 황사영의 집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여기에 연못이 파였다』라는 증언이 토대로 생겨났다.
□ 자료검증-강화생가설의 오류
첫째,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 중에서 황사영의 생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확실한 자료는 이기경의 「벽위편」만한 것이 없다. 「벽위편」에 수록돼 있는 황사영의 결안(結案)은 이미 의금부에서의 추국 과정을 거치면서 확인된 후에 작성된 것이다. 또한 황사영이 한미한 집안이 아니라 그의 증조부가 공조판서를 지낸 명문 거족 출신으로 출생지를 속인다고 하여 속여지는 것이 아니다.
문초 기록에서 흔히 지적되는 지명 오기 역시 황사영 태생지인 「서부 아현」처럼 분명한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1932년에 간행된 「속수증보 강도지」를 근거로 한 황사영의 강화 생가설은 자료 선정과 해석상의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편찬, 간행된 강화부지는 「강도지」(1694~1696), 「강화부지」 구본(1769), 「강화부지」후본(1783), 「강화부지」신본(1893), 「속수증보 강도지」(1932)가 있다. 이중 황사영 집안에 대해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던 시기에 편찬된 것은 1783년 강화부 유수 김노진이 편찬한 「강화부지 후본」이다. 그러므로 이보다 150년이나 늦게 편찬된 「속수증보 강도지」를 전거로 삼는 데는 문제가 있다. 「강화부지 후본」에는 어디에도 황사영의 증조부인 황준과 부친 황석범, 그리고 황사영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1782년에 공조판서로 임명된 황사영의 증조부가 강화도 출신이었다면 분명히 그와 그의 아들 황석범은 「강화부지 후본」에 수록됐어야 할 것이다.
셋째, 황상영이 경술년(1790년,정조14) 진사시에 합격했을 당시 기록인 「사마방목」에도 황사영의 태생지가 「아현」으로 기록돼 있다.
넷째, 황사영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그의 조부 황재정(1717~1740)과 조모 이씨(1716~1782), 부친 황석범(1746~1775)이 사망한 뒤였다. 그러나 증조부 황준(1694~1782)과 증조모 남씨는 생존해 있었다. 황준은 1771년 3월 78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응시 급제하여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어 황준은 황사영이 태어난 해인 1775년 「회혼례」를 지내 12월 19일 영조로부터 미포를 하사 받았고, 1782년(정조6년) 8월 18일에는 89세의 나이로 실직인 공조판서를 제수 받았다. 그는 공조판서로 임명된 지 얼마 후 사망했다. 이렇게 볼 때 황준의 「강화도 낙향설」은 단지 추정일 뿐이고, 사망 때까지 서울에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황사영의 집안은 장무공 황형 이후 8형제로 분가했다. 이중 강화도 대묘동을 근거로 삼은 이는 장남인 부정공 황찬의 후손이다. 황사영 집안은 장무공의 차남인 판윤공 황침의 후손으로 강화도에 세거한 것이 아니며, 장무공의 9~12대손인 황준과 황사영 대에 와서 새삼스럽게 강화 대묘동을 근거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또 「눌암기략」에는 강화도에 거주한 황사영의 숙부 황석필이 『황사영이 천주교를 신봉하는지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어 황사영은 강화에 거주하는 숙부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것 같다.
여섯째, 샤를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는 『황사영이 1798년과 1799년에 서울로 올라와서 애오개라는 동네에 살았다』고 적고 있지만, 달레의 원전인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는 『황사영은 1798년과 1799년에 서울의 애오개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달레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다.
□ 황사영 생가는 현 서울 아현3동 일대
「강화부지」나 「샤를르 달레」의 기록은 오히려 강화 생가설을 부정하는 자료가 될 뿐이다. 영ㆍ정조 실록 역시 황사영이 태어났을 당시 황준이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황사영의 증조부 황준이 공조판서를 역임한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그가 언제 이를 제수 받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영ㆍ정조 실록이 말하는 것처럼 사망하기 직전인 89세때 공조판서를 실직으로 받는 예는 아주 드물다. 이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적어도 황준 이래 황사영까지 4대는 강화도와 관련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서부 아현」은 지금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가? 영ㆍ정조 때의 「서부 아현」은 지금의 마포구 아현동 지역으로 이 마을에는 현 경기공업 전문대가 있는 자리에 환자를 치료하던 서활인서(西活人署)가 위치했으며(아현3동), 고개 아래마을에는 복조리 상인들과 놋그릇을 파는 바리전, 유기 제조 공장들이 많았다(북아현동 입구에서 아현동 사이). 반면에 활인서 뒤편과 유기 상점 뒤로는 일반인들의 거주지였다. 황사영의 생가도 바로 이 지역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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