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고위 성직자를 포함한 천주교 인사들이 왜 갑자기 북녘땅을 방문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 방문이 어떻게 성사될 수 있었는지,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왔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다. 분단이후 수십년간 팽배해온 냉전논리와 반공교육으로 무장되어온 우리의 정서와 의식이 아직도 남북간의 관계를 떠올릴 때 기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물론 그 의문과 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민족화해위원회의 방북은 결코「갑자기」이루어진「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희망속에 3년이란 세월동안 꼼꼼하게 준비되고 만들어진 즉「준비된 사건」이었다. 교회 신문을 관심있게 살펴본 사람들은 이미 알 수 있는 이 준비된 사건은 95년 광복 50주년의 해를 기해 민족화해위원회라는「특별한 기구를 결성하면서 시작됐다.
광복 50주년이라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아주「특별한」해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 나아가 통일을 꿈꾸며 출범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그해 10월말 남의 나라땅인 미국「뉴욕」에서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신자들과 북미주교포신자들이 함께 만나 형제적 친교를 시도하는 것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제3국에서 시도된 이 만남은 당시까지만해도 북한 문제라면 경직 일변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다소 어색하고 어설픈 상황속에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미나 형식을 빌린 이 만남에서 우리는 비록 어색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피를 나눈 한 형제라는 틀림없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공식적인 발언」과「공식적인 태도」를 빼고 나면 그들은 영락없는 우리의 형제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지막지하게 단절된체 흘러온 50년의 세월을 결코 감출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일치의 기쁨을 맛보다가도 전혀 낯선 얼굴을 대하는 기분. 아마도 우리가 느껴야 했던 이 이질적 감정과 단절의 기분은 50년이라는 세월이 남긴 상흔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참으로 어렵지만 시도된 이 만남은 결국 두번째 만남이라는 고리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6월 북경에서의 재회는 95년의 첫 대면과 사뭇 달랐다. 다시 만났다는 기쁨 속에서 조금은 뻣뻣하다시피했던 그들의 입장은「주교님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서부터 확연하게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등한 입장에서 출발한「북녘의 신자들」은 어느새 자기 스스로를 목자를 따르는「양떼」로 지칭하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왜 만나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인듯 싶었다.
북경에서의 만남은 이미 95년부터 시작된, 아니 불거진 북한의 기근과 굶주림, 그리고 이를 지원해온 민족화해위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식량자원 상황 등을 함께 나누는 차원으로 대화의 성격이 규정돼 버렸다. 그들은 절박한 손길을 내 밀었고 우리는 그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북경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나라에서 만날 필요가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 공동의 인식이 민화위의 평양행을 만들어냈고 세번째 공식만남은 평양에서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표현대로「삼세번」만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95년 민족화해위원회가 출범할 당시의 상황은 첫 머리에서 지적했듯이 결코 평탄치 않았다. 주변의 인식도 그랬고 교회의 분위기도 염려와 우려가 절반이 넘게 섞여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미「햇빛론」의 우위성을 계속 역설해온 김수환추기경님의 뜻은 민족화해위원회의 기본정신과 맞물려 사랑이 우선이라는 확고한 틀을 만들 수가 있었다.
발족과 더불어 시작된 매주 화요일의「화해미사」, 역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해 개설된「민족화해학교」는 96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북녘 동포돕기 국수나누기 밀가루 옥수수 등 식량지원 운동과 한 궤를 이루며 민화위 활동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를 잡았다.
결국 기도 운동과 교육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라는 세가지 방향이 기조를 이루면서 민족화해위원회의 활동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자들의 참여를 촉발시킬 수 있었고 그 결실은 엄청난 성과로 드러난 것이었다.
한국의 고위 성직자가 분단 50년만에 북한땅을 밟은 이 역사적 사건은 결코 우연이나 갑자기가 아니었다. 주교님을 중심으로 한 민화위 일행의 방북사건은 인도적 차원의 사랑과 나눔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지난 3년간의 노력과 준비가 바탕이 된 하나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가지 우려속에서도『참으로 잘 갔다』는 것이 방북자 모두의 결론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최근 벌어진 잠수함 침투사건 등 일련의 사태는 북녘을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위축시키고 있다. 이같은 돌발변수는 민족화해위원회가 국수나누기 옥수수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던 96년 이미 한차례 지나간 폭풍우였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폭풍우, 이「어이없는」폭풍우야말로 북녘동포를 돕는 일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인내를 갖고 풀어내야 할 크나큰 숙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감추고 싶은 이야기] 이윤자 편집국장 북한 방문기 셋 : 준비없는 결과 없다
북한 방문, 3년 공들인 “준비된 만남”
95년 미국 뉴욕서 첫 만남 대화 물꼬 터
97년 중국서 재회…도움의 손길 내밀어
기도운동 교육 나눔통해 신자참여 봇물
마침내 서울 민화위 관계자 “방북 결실”
발행일1998-08-02 [제2113호,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