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평화를 위해 예수 성심께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봉헌한 에디트 슈타인.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십자가의 힘을 체험하고 가르멜 수도회의 수녀로 숭고한 삶을 살았던 그는 지난 10월11일 시성됐다. 이에 본보는그의 시성을 기념해 가르멜 수도회에서 제공한 글을 연재, 사랑과 순교의 열망으로 가득찼던 그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진지한 삶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에 위치한 브레슬라우에서 전통적인 유대인 가정의 11번째 아이로 출생하였다.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는 그가 2살 때 일사병으로 사망하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가 이 사업을 떠맡아 성공함으로써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어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대학교육까지 받게 된다. 에디트는 자서전에서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유대 신앙심에 대한 전통적인 준수, 타종교에 대한 존경,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대함 등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에 대한 종교 교육에 관한 한 자신이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에디트 슈타인이 유대 종교를 상실하게 되는 원인으로서 나중에 지적된다. 후일 에디트가 이런 시절의 믿음을 잃어버렸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증언으로써 「내가 성공한 모든 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라고 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ㆍ」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런 교육방식은 유감스럽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니 어머니 외 다른 가족들에게 유대교의 예절은 형식적으로 치러지게 되고 축제의 의미도 사라져버리고 만다. 대체로 축제일의 봉헌에는 어머니와 어린아이들이 예절에 참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기도를 바쳐야 하는 오빠들은 경건함이라고는 거의 없이 그렇게 하였다. 장남이 참석하지 못하여 차남이 가장의 역할을 할 경우, 모든 예식이 그에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하였다. 에디트는 진학을 스스로 포기하고 조카를 돌보며 한동안 함부르크의 큰언니 집에서 지내게 되는데, 거기서는 유대종교에 대한 흔적마저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도 더 이상 유대종교를 실천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인간의 삶에서 종교세계는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종교의 의미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진지해 지기 위해서는 이런 종교를 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 기록된 다음 말씀은 이런 생각을 고무시켜주는 듯도 하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내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3,15)
에디트에게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신앙의 자세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가족과 친지들의 미지근한 신앙생활 속에서 차가워진 그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을 체험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고 이후 그의 신앙은 내내 뜨겁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오직 삶에 대한 변함없는 진지함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비록 에디트가 14세부터 21세까지 무신론자로 살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지만,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의미 있는 진리를 찾아 무의미한 신을 떠났던 것이다. 유대교로부터 멀어져 불가지론에 빠져들게 된 것은 그가 진리로 향해 나아가는 단계들이었다. 에디트에게 진리는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세계와 자신에 대해 신뢰로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총체와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리에 대한 추구는 「결정적인 명확성」을 획득하기 위한 급진주의적 질문의 방법으로 특징지어 진다. 이것의 그의 삶의 자세와 관련되며 「자주적인 인간(Selbstandiger Mensch)」으로서 행동코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의 힘
에디트는 1913년 4월에 괴팅겐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환경에서 에드문트 후설의 철학을 매개로 진리에 접근하기를 희망하였다. 현상학의 스승을 감싸고 있는 철학적이고 인간적인 분위기에 에디트는 열광하였고 즉시 후설의 가장 측근에서 함께 연구하는 동료가 되었다. 후설의 사실적이고 선입견 없는 연구 방법은 많은 제자들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로 인도하였다.
학기가 시작한 후에 「괴팅겐 학파」에 가입하기 위해 라이나흐를 처음 방문하게 된다. 아돌프 라이나흐를 만남으로써 호의적인 사람들로 에워싸인 박애의 세상을 발견하게 된 에디트는 막스 쉘러와의 만남을 통해 종교세계에 대한 체험도 갖게 된다. 당시에 그는 가톨릭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번득이는 그의 정신과 어휘력으로 이 사상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때까지 에디트에게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던 이 가톨릭 사상과의 만남은 이렇게 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신앙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이것은 그에게 눈을 감고 지나쳐버릴 수 없는 「현상들」 가운데 한 영역을 그에게 열어주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철학연구가 그에게 유일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세계에 대한 눈은 이제 분명히 떠있는 상태가 되었다. 자서전에서 에디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사물을 편견 없는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모든 「눈가리개」(Scheuklappe)」를 벗어 던져야 한다는 엄명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의식하거나 느끼지 못한 채 상상해 온 합리주의적인 편견의 한계와 믿음의 세계가 갑자기 내 앞에 드러났던 것이다.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고 경탄하여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은 이 세계 안에서 살고 있었다. 이 세계는 적어도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가차가 있었다. 그러나 당분간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다루어 보지는 않았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에디트가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후설의 조교가 된 이듬해인 1917년 말경에 아돌프 라이나흐는 플랑드르 지방의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된다. 에디트의 고통은 물론 컸으며, 그는 무엇보다도 라이나흐의 젊은 미망인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에디트에게 십자가의 힘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에디트의 전기를 처음으로 낸 쾰른 가르멜의 레나타 수녀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무신론자인 에디트 슈타인의 눈에는 허탈감을 주는 사건으로 비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자인 라이나흐 부인에게는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 섬세하고 예민한 영혼에게 골수에까지 이르도록 야기한 그 깊은 고통은 훨씬 더 고상한 마음의 성향을 일으켰으니, 그것은 십자가를 매개로 내밀하게 그 자신과 결합하시는 주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기꺼이 준비되게 한 것이다. 고통으로 가득 찬 그 얼굴은 신비한 빛으로 변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비추어지는 빛으로 빛나는 축복 받고 구원된 얼굴이었다. 에디트는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부인의 평온함에서 몹시 감명 받았고 이 감명을 일생동안 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와 이 십자가를 껴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하느님의 힘을 그때 처음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비로소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원의 수난으로부터 탄생한 교회를 눈부신 십자가의 실재 전체 안에서, 죽음의 아픔을 누르는 십자가의 승리 안에서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순간 나의 모든 불신은 무너져 내렸고, 유대이즘은 빛을 잃었으며, 그리스도는 나의 눈앞에서 찬란하게 떠올랐다. 십자가의 신비 안에 계신 그 그리스도께서 말이다.』
<가르멜 수도회 제공>
10월 11일 시성된 에디트 슈타인(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 수녀)의 삶과 죽음 (1)
무신론자에서 수녀로, 숭고한 삶 살아
1891년 전통적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
막스 쉘러와 만남 통해 가톨릭 사상 체험
‘십자가의 힘’ 경험 후 뜨거운 신앙 불살라
발행일1998-10-18 [제2123호,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