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수단 난민수용소에서 구호활동을 펴고 있는 살레시오회 공야고보 수사(이탈리아인)가「와우」수용소의 참상을 생생히 기록한「선교체험기」를 보내왔다. 와우 지역은 지난 93년9월 가톨릭신문사가 주교회의 사회복지회와 공동으로 방문 후 현지상화황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바 있다. 국내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을 호소하며 공야고보 수사의 체험기를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굶주림으로 하루에 200여명 이상이 죽어가는 와우의 난민 수용소에서 아프리카의 대살상은 계속되고 있고, 그 참상을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단의 남부 가잘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고, 굶주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만 간다는 비극적인 소식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카르툼(Khartoum: 수단의 수도)의 우리 공동체는 지난8월, 나를 그곳으로 파견하여 뭔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도록 했습니다.
죽음의 땅「와우」
가잘(Ghazal)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와우(Wau)에 가기 위한 허가를 받는 데만 15일이나 걸렸습니다. 저와 다른 자원봉사자 두 명, 그리고 요한 신부님과 함께였습니다. 유엔에서 전세를 내어 운항하고 있는 비행기에는 우리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여행을 비행기로 하기에는 불가능했습니다.
목적지에 중간쯤 되는 지점으로, 카르툼에서 약650km정도 떨어진 오베이드(Obeid)라는 곳까지는 트럭으로 가고 나머지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비행기를 얻어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달려 아침 5시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에게 총을 겨누는 군인을 제외하고는 공항에 얼씬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마에 총구멍이 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 군인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빨리 짐을 싣지 않고 뭘 하는냐?』러시아인 조종사가 바짝 긴장해 있는 우리들을 재촉하여 서둘러 짐을 싣게 했습니다.『비행기는 즉시 이륙할 것입니다』구소련제경비행기를 본 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기체는 매우 낡아 너덜너덜하고 바퀴는 다 닳아빠진 그런 고물 비행기였습니다. 그래도 비행기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두 시간의 여행 끝에 마침내 와우에 도착하였습니다. 비행기는 곡예를 하며 간신히 땅에 멈춰섰고, 조종사는 다시 군인들이 총을 쏘기 전에 빨리 날아올라야 된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싣고 온 짐을 빨리 내리도록 재촉하였습니다.
와우는 군인들의 트럭이 질주를 하고 있었고 어디서든지 금방 총알이 날라올 것 같은 긴장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보안대사무실에서는 우리에게 저녁 5시 이후에는 밖에 나가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비행기가 오는 것을 보고 다른 비행기들처럼 식량을 공수 투하하겠거니 생각했던 많은 아이들이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떠나가는 비행기의 뒤꽁무니를 허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짐을 내리는 도중에 여기저기 떨어진 몇 알의 콩과 밀을 줍기 위해서 벌떼처럼 달려드는 아이들이 정말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기아의 현장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요한 신부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다가와 악수를 나누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딩카족의 군인들로서 비쩍말라 갈비가 그대로 드러나고 종아리에는 살이 한 점도 붙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지난 1월의 대공세 때 요한신부의 생명을 위협했던 열여섯살된 군인도 있었습니다. 나는 요한 신부에게 물었습니다.『이 젊은이는 신부님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눠 저 세상으로 날려버린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던 그 친구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치도 형제처럼 서로 포옹을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때 저 친구가 나를 납치하지 않았었다면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들에게 저 젊은이는 틀림없이 총살당했을 것입니다』라고 요한 신부님은 답하였습니다.
살레시오 수녀회의 세실리아 수녀님은 우리가 가져온 약품과 약간의 식량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독일에서 보낸 약품 컨테이너들을 찾아 올 때까지 적어도 2주 동안은 걱정없을 거라고 말입니다. 구호물자를 담은 컨테이너들은 딩카족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정부군들의 비협조로 이미 3주째 공항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곳의 주교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작은 트럭에 올라 살레시오 수녀들이 운영하고 있는 구호소로 갔습니다. 대문 밖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었고, 안에도 1천5백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세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첫째 그룹에는 6백 명 정도의 고아들의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아마도 이곳와우로 오는 도중에 죽었거나 아니면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일 것입니다.
음식을 받아먹을 힘마저도 없이…
먹을 것을 나눠주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유니세프에서 제공하는「Unimix」라 불리는 콩죽 한 국자를 받을 기력이 없어서 땅에다 국그릇을 쏟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울음조차 없는 맥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손으로 주워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린이들과 엄마들은 오랜 시간 굶주림에 시달린 최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실리아 수녀님은『이렇게 허약한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보살펴 준다면 1주일 안에 회복할 수 있지만 두 명의 수녀가 약 2천 명의 아이들을 매일 돌봐야 하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정말 가슴이 메어진다.』고 말합니다.
다른 그룹의 아이들은 그렇게 위급한 형편은 아니지만 회복을 위해 영양보충과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입니다. 먹을 것을 나눠줄 때 자기 것을 재빨리 타먹고 또 뒤로 달려가 더 타먹는 아이들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수녀님은 내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아이들을 알고도 모른 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음식을 나눠주는 동안, 한 아이가 우리에게 와서 멀지 않은 곳에 환자들이 버려져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곳으로 간 우리는 차마 눈을 뜨고 불수 가 없었습니다. 한 엄마가 두 아기를 품에 안고 낙엽같이 비쩍 마른 젖을 물린 채 퀭한 눈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8월16일, 주일 미사 도중에만도 4명의 죽어가는 환자들이 병원으로 옮겨져 왔습니다. 더 많은 환자들을 받을 수 있도록 침대를 밖으로 내어 놓고, 마당에는 천막을 몇 개 쳐서 그늘 아래 환자들이 누울 수 있도록 해보지만 환자들은 계속 옮겨져 옵니다. 요한 신부님과 함께 그 네 명의 환자들을 한 병실 땅바닥에 뉘어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병원이란 말입니까? 돼지우리도 이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땅에 뉘어진 엄마들은 자식들에게 나오지 않는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배설물과 오물 사이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요한 신부님은 참을 수 없는 악취 때문에 결국 방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발가벗은 시신들 옆에 겨우 사람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는 환자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네 명의 환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지만 어디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트럭 한 대가 도착하고 두 사람이 내리더니 시신들을 트럭에 실었습니다. 그들은 마치도 감자 포대를 싣듯이 능숙한 동작으로 시신들을 트럭에 실었습니다.
아귀(餓鬼)의 생지옥
아일랜들인인 그곳의 유일한 의사를 만났습니다. 실망으로 가득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나는 소말리아에도 있었고 르완다에도 있어봤지만 이곳처럼 처참한 곳은 처음입니다. 병원에 도착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시체」입니다.
그들은 몇 달 동안이나 굶은 사람들입니다. 위장과 장은 말라 있습니다. 그들에게 처음 음식을 줄 때에는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위경련을 일으켜 죽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음식물을 위에 담아두지를 못하고 즉시 설사로 다 쏟아내기도 합니다』
<계속>
[공야고보 수사의 선교 리포트] 대학살의 땅 아프리카 수단 (상)
마른 젖을 물린채 죽어가는 엄마… 생지옥이 바로 “여기”
생사를 건 비행끝에 목적지「와우」에 도착
공항ㆍ마을 곳곳에 총든 군인들…전운 감돌아
땅에 떨어진 콩 몇 알에 몰려드는 아이들 “기아현장”실감
발행일1998-10-25 [제2124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