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전에 내린 첫눈의 잔해가 곳곳에서 뒹굴며 겨울추위를 시위하는 강원도, 그 추위마저 얼어붙게 만든 분단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 양구.
철책선이 눈 앞에 선명히 바라다 보이는 양구의 해안공소를 찾는 길은 그곳의 겨울 추위만큼이나 사람의 기를 죽인다. 원통을 들러 다시 버스를 타고 40여분, 서화리 종점에 내리면 헌병들이 지키고 선 바리케이드와 함께 민통선이란 말로만 듣던 글자가 그 크기에 비해 눈에 크게 들어온다.
이곳부터는 특별한 방문 이유가 없는 이들은 스스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민통선이란 글자가 던져주는 위압감은 그 단어가 가진 불안감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침과 함께 삼키고 신분증 검사를 거쳐 군인들이 지키고 선 다리를 넘어서면 마을이라곤 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수백미터 간격으로 점점이 버티고 선 OO부대, OO포대 등의 이름을 단 군 부대들은 긴장감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게 할 뿐. 지리하게 이어진 골짜기와 그 골짜기를 품고 난 길을 따라 또 한참을 달리면 나타나는 첫 마을이 해안면이다.
제4땅굴 걸어서 1시간
제4땅굴이 걸어서 한시간 거리에 자리한 양구군 해안면은 역사의 아픔만큼이나 이를 위로하려는 손길도 적지 않았음을 직감케 한다. 450여 가구로 면단위로는 규모가 남한에서는 손꼽을 만큼 작다 싶은 이 마을엔 개신교 교회가 셋, 절이 한군데, 그리고 이들 틈에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해안면 천주교회가 마을 가운데 다가서 있다. 실제로는 강원도 원통본당(주임=이상철신부)의 세 공소 중 하나이지만 이 인근에서는 모두들 천주교회로 부르고 있다.
이 해안공소를 상대적으로 큰 다른 교회들에 주눅들게 하지 않고 새로운 힘으로 일렁이게 만드는 이가 있다. 해안공소의 전교회장 정광철(야고보) 선교사가 바로 그 주인공. 새해와 함께 64살이 된 정 선교사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선교사들 중 최고령층에 속한다. 정씨가 해안공소를 찾은 것은 올 2월, 선교사의 길에 발을 들여 놓은 지 3년만의 일이다.
선교사들중 최고령층(?)
50대 후반이라는 그 무엇도 결심하기 쉽지 않은 나이에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찾게 된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는 정씨는 나이가 무색할 열정을 쏟아놓고 있다. 『기존의 신자들이 탄탄해지면 자연히 예비신자들도 늘어나게 마련이지요』
해안면 주민들 중 18가구 뿐인 신자수에 비해 30여년이 넘는 공소의 역사를 접하고 스스로도 놀랐다는 정 선교사는 『신앙이 다져지지 않은 가운데 신자 숫자만 늘린다는 것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름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며 무엇보다 내실있는 신앙생활을 먼저 꼽는다.
긴 역사 비해 교세 열세
해안에 진출해 있는 다른 종단들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공소에 비해 두배가 넘는 교세를 가지고 있는 점에 주눅들기는 커녕 오히려 열정이 솟는다는 정선교사의 하루는 그의 열정을 담아내기에 스물네시간이 부족한 듯했다.
그가 오고 난 후부터 새벽 5시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소를 찾는 신자들을 위해 그도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공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미소로 이들을 맞는다. 『제 생활이라고 해봤자 정을 심어주는 것, 그것 뿐입니다』
간단한 것 같은 그의 철학은 적잖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이런 열정 밑바탕에는 부인 조예식(실비아)씨의 묵묵한 내조가 자리하고 있다. 두 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손주들의 재롱을 지켜보고 살 나이에 접어들고서도 남편을 따라 외지를 떠돌아야 하는 삶이 피곤할 것도 같았지만 그런 기색이라곤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시에서는 맛보기 힘든 따뜻함이나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순박함이 오히려 이 곳을 고향, 내집이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어요』
종업원 7-8명을 둔 가구공장을 운영하며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며 본당의 사목위원, 단체 회장 등을 하던 정씨 내외는 이미 시골 사람이 되어 있는 듯했다.
사장에서 선교사로 변신
정씨는 요즘, 공소문을 열어 놓고 두툼한 옷을 챙겨 입고 새벽길을 나선다. 자신의 걸음걸이로 한시간이 넘는 제4땅굴로 가는 새벽 운동길에서 볼 수 있는 동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새벽길을 걸어온 지 벌써 몇 개월이 되고 있다. 이런 그의 부지런함으로 요즘은 오후에도 새벽에 만났던 이들과의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술자리 초청도 가끔씩 오가고 있다. 이렇게 넓혀온 생활로 새로이 영세한 이가 지난 첫해 네명, 꽤 괜찮은 수확인 셈이다.
50대 신자가 70퍼센트를 차지하고 60대는 노인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해안공소, 묵주기도조차 귀에 설어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 정씨를 오히려 바쁘게 몰아 세운다. 다가올 2천년 대희년의 고민은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비해 벅차 보이기까지 했다.
『2천년 대희년이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공소 신자들이 냉담의 꺼풀을 벗고 새로 나는 게 대희년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같이 매주 미사를 봉헌하게 된 것도 최근 몇 년간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이곳 신자들은 봄 가을로 1년에 두 번 미사를 봉헌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리적 문제 등으로 쉽게 신부들이 찾지 못했던 것도 문제지만 공소 신자들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다른 모색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처럼, 절망에서 희망으로”
30여년이 넘게 이어져온 해안면의 분위기가 기존의 신자들 사이에 냉담의 그늘을 길게 깔고 있음에 잠시 잦아들었던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 정씨가 자신의 방에 써 붙인 구호다.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는 철책선, 밤에도 꺼지지 않는 도시만큼이나 밝은 철책조명등 속을 거닐며 정씨는 2천년 대희년 초입까지로 예정된 공소에서의 삶을 그려본다. 『주님, 이들 중 몇이라도 당신을 뜨겁게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는 대희년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써주십시오』
여름에 비해 주민들의 일손이 한가한 요즘은 정씨에게 가정방문이 주된 일과가 된다. 그렇다고 큰 주제나 얘깃거리를 가지고 이웃들을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점심을 같이 먹거나 저녁에 간단히 술잔을 나누며 생활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서 믿음의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한다. 민통선까지 찾아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 각자의 고단한 삶을 열고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모습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에서 큰 기쁨 발견하길 바라
대희년, 큰 기쁨을 자신들의 삶에서 조금씩이나마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정 선교사의 새해를 맞는 소망이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이 복원되는 꿈, 나눔과 격려가 일상화되는 희망, 그런 2천년 대희년이 몸도 마음도 얼어붙는 철책선을 마주한 이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지 정 선교사는 자신의 삶을 통해 꾸준히 시험해 나갈 것이다.
[새해르뽀] 할아버지 선교사 정광철씨의 199년 '새해맞이'
“신자들이 탄탄하면 전교는 저절로 돼요”
새벽 5시부터 신자 맞아, 열정 담기엔 24시간이 부족
“정을 심어 주는 것, 그것 뿐입니다”
우리 신자들 「냉담의 꺼풀」벗고 새로 나는 게 대희년
발행일1999-01-01 [제2133호, 14면]

▲ 신자가정을 방문해 신앙이야기와 살아가는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 정광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