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의 부조화, 가치관의 혼돈, 자아가 점점 상실되어가는 요즘이다. 무엇을 통해 신앙의 근원을 찾고 어떻게 생활안에서 신심을 실천해야 할지 뚜렷한 대답을 듣고 싶다. 서울대교구 천호동본당 신자들이 이러한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순교자 신심을 찾아 나섰다.
9월 순교자성월을 맞아 가진 성지순례라 그런지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새댁에서부터 칠순이 훨씬 넘은 할머니까지 참가자들의 연령도 다양했다. 그만큼 순례를 통해 받은 느낌도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신앙인들에겐 순교자들의 삶이 좋은 표양'이라는 사실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천호동 신자들의 성지순례를 통해 순교자들의 신심을 되새겨 본다
9월 7일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으로 천호동본당 신자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가벼운 복장에 발걸음도 가볍게. 그러나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해보겠다'는 경건함이,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명동대성당 지하 소성당에 모인 신자는 43명. 이들의 순례를 지도할 봉사자는 김순금 (마리아, 53)씨와 이영주 (리더비아, 42)씨.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파견한 봉사자들이다.
시작기도를 봉헌한 순례단은 이어 순교자현양위원회 성지현양분과 신명자 (헤레나)위원장의 인사말을 들었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는 하루가 되세요. 순교신심이 우리 안에 자리잡기를 기도하고 이웃에게, 후손에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말씀의 전례 후 봉사자로부터 '무엇을 구하러 여기까지 왔는가?' '왜 신앙선조들은 목숨까지 바쳤는가?' '평등정신지닌 성체성사의 신비를 깨닫자'라는 묵상거리를 전해들은 순례단은 명동성당의 역사, 명동성당 지하묘역 성해실의 연혁 등을 공부했다.
신자들의 기도, 순교자 기도를 봉헌한 순례단은 다음 목적지인 서소문밖 네거리로 향했다. 1801년 이래 100명이 넘는 신앙선조들이 순교한 곳.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순교성지. 103위 한국성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정하상 바오로 김아기 아가다 등 44위 성인을 탄생시킨 순교기념터. 지하철 공사 때문에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서소문이 바라다 보이는 중림동(약현)성당으로 향했다.
서울시 사적 제252호.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성당. 그러나 지난 2월11일 화재가 난 중림동 성당은 시커먼 숯으로 변해 있었다. 순례단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한숨 소리. 한 독지가가 성당복구를 위해 도자기들을 기증했다 한다. 많은 수의 순례단원들이 하루빨리 중림동성당이 복원되기를 기원하며 도자기를 구입했다.
서소문순교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는 성교절요 (활판본. 1936)와 천주교 진리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한 진리본원(眞理本原. 1934) 등을 눈으로 확인한 순례단은 용산전자상가 뒤편에 있는 당고개 성지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굳게 믿나이다. 진실하온 주님 말씀…" 하느님 찬미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순례단원들. 이동중인 차량속에서도 우렁찬 성가와 기도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새남터와 서소문, 왜고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당고개는 1839년 12월27~28일(음) 이틀동안 열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순교의 땅이다.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며 최양업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이곳에서 순교의 관을 쓴 한 많은 사연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간은 벌써 12시를 훨씬 넘었다. 순례단원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듯 했다. 그러나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씩씩하게 걸어오는 백발의 한 노인이 눈에 띈다. 이태순(안나)할머니. 올해 74세란다. 순례단 선두에 나서 봉사자를 바짝 뒤쫓는다.
"신앙선조들의 삶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힘든 것도 아니죠.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피곤하지 않네요". 이태순 할머니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울먹거리기도.
수원교구 안양 평촌본당 순례객 4명이 당고개에서 순례단에 합류했다. 동승한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등 순례단원들의 사랑나눔은 또 하나의 감동이었다.
용산구 서부 이촌동 한강변에 위치한 새남터는 국사범을 처형하는 형장으로 11명의 목자와 수 많은 신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곳.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했고, 1846년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치명했다.
개에 물린 흔적으로 겨우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찾아내 미리내로 이장했다는 이야기. 모든 사실을 편지로 기록해 둘 정도로 역사의식이 투철하셨던 분. 교회사 차원을 넘어 한국사적으로도 위대한 인물. 김대건 신부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를 합창하며 새남터 순교자 유해실 앞에서 순례단원들은 촛불봉헌을 했다.
"이번 순례를 통해 순교자 신심이 과연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를 바탕으로 이웃과 가족들에게 더욱 더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이경례 (소피아. 50)씨. 사사건건 성당일이라면 못마땅해하는 비신자인 남편이 이번 순례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며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기뻐하는 한 레지오 단원. 버스를 10분만 타도 멀미가 나는데 오늘은 왠지 멀미가 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한 안나회 회원. 양품점을 운영하는 이신광 (발바라, 56)씨는 가게문을 닫고 순례에 참가했다. "수입은 조금 줄어들겠지만 순례의 기쁨은 열두배나 크다"며 즐거워했다.
드디어 마지막 순례지인 절두산으로 향했다. 절두산은 원래 '용두봉' '잠두봉'이라 불리던 '양화진'나루터 서편에 위치한 봉우리. 예부터 한강을 내려다보는 명승지로 유명한 곳. 그러나 가장 혹독했던 병인박해동안 수천명의 신자들이 이곳에서 무참히 목이 잘려 치명을 함으로써 이곳의 이름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변하게 됐다 한다.
작년에 사적지로 지정된 이곳엔 순교기념관, 순례성당, 순교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등이 있다. 지하묘소에서 103위 성인 기도를 봉헌하고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한 순례단은 순교기념관으로 이동, 유품들을 관람했다.
가톨릭 신앙을 인식시키는데 한몫했다는 세 번째로 오래된 세계지도인 곤여지도(坤輿地圖), 정약종이 쓴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 동정부부 누갈다와 요한의 십자고상 등 순교자들의 혼이 깃든 각종 유품들을 관람한 순례단원들. 집으로 돌아갈 버스에 오르면서도 그 감동에 경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단원들의 모습에서 좥왜 순례에 참가했는지좦에 대한 의문이 말끔히 씻어지는 듯 했다.
◆「하루성지순례」이끈 순교자현양위 순례봉사자 김순금ㆍ이영주씨
“참가자 중심의 성지순례 돼야죠”
순례에서 깨달은 신앙 실천이 중요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파견된 성지순례 안내 봉사자 김순금(마리아ㆍ53)씨와 이영주(리더비아ㆍ42)씨. 이들은 하루종일 순례단을 지도하느라 목이 다 쉬었다.
『순교자들의 삶을 체험하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음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참가자들은 순례에서 깨달은 신앙인의 정신을 가정과 직장에서 행동으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죠』. 김순금씨는 「신앙선조들의 삶이 곧 복음의 삶」이라고 강조한다.
김씨는 간혹 기도서나 성가책도 없이 참가하는 신자들이 있다며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 순례자들에 대한 교육이 좀 더 강화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순금씨는 봉사자 교육 1기생으로 벌써 4년째. 20여 차례나 순례 지도를 하고 있다. 이영주 씨는 교육 2기생으로 아직은 새내기에 가깝다. 이번이 두번째 봉사다.
『몸이 아파 과연 봉사자로서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는 이영주씨는 『나 자신의 생각을 접어두고 하느님의 섭리에 순응하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영주씨는 또 『고통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원천』이라며 『순례 참가자들이 고통의 신비를 체험해 신앙 쇄신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신앙에 입문한지 20년째 접어드는 이영주씨. 4대째 내려오는 뿌리깊은 신앙을 갖고 있는 김순금씨. 김순금씨는 『참가자 중심의 순례가 돼야 할 것』이라며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순례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 하루 성지순례란?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배갑진 신부)가 하루 일정으로 마련하고 있는 「서울 순교사적지 순례」는 큰 부담없이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할 수 있는 성지순례. 각 본당이나 단체별, 개인별로 참여할 수 있으며 일정 인원이 되면 버스로 순례를 실시한다.
참가비는 중식포함 1만2000원. 현재는 명동성당을 출발, 서소문밖네거리(중림동 성당), 당고개성지, 새남터순교지, 절두산을 순례한다. 그러나 금명간 마재성지 등을 포함, 2~3개 코스로 세분해 여유있게, 또 충분히 묵상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줄 예정이다.
※문의(02)779-0753
[순교자성월 특집] 르포 - 순교성지를 찾아서 : 서울 천호동본당 신자 43명 순교신심찾아 하루 성지순례
아하! 순교자들 삶·신앙이 이러했구나!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주최
명동성당-서소문밖네거리(중림동성당)-당고개-새남터-절두산 순례
발행일1998-09-20 [제2120호,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