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은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01년 1월 벽두부터 조선 정부는 한국 천주교회를 향해 공식적으로 박해령을 낼기ㅗ 오가작통법을 시행해 천주교 신자들을 한명도 빠짐없이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와 함께 4대 박해 중 하나로 불리는 신유박해로 인해 조선교회는 대부분의 지도자들을 잃었고 목숨을 빼앗긴 순교자는 200을 헤아일 저도로 가장 큰 박해 중 하나였다.
한국교회는 1984년 103위 성인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 즉 신유박해를 포함한 초기 시기의 박해로 목숨을 잃은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들은 성인이나 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커다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다행히 신유박해 2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는 각 교구별로 신유박해를 포함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시성시복을 위한 조사 연구 작업과 시복시성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교구별 시복시성 운동
1984년 103위의 성인이 탄생했을 때 한국교회는 위대한 신앙의 선조를 두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성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각종 현양 사업과 성지 순례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듬해 5월 20일 한국 주교회의 전례위원회가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98위」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을 인준하고 추진위원을 위촉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이후 103위 탄생의 열기가 식고 있다는 반성과 함께 교구별로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복시성 운동의 닻을 올린 곳이 전주교구. 전주교구는 1989년 교황청에 「윤지충(바오로) 등 다섯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청원서」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전주교구는 이에 앞서 1988년 치명자산 성역화 추진위원회에 이어 「시복시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991년에는 원주교구에서 황사영과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을 준비했고 1995년부터는 청주교구에서도 최양업 신부 시복 준비를 하면서 공조 체제를 이루었다. 수원교구에서는 1996년 「윤유일(바오로) 및 7위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해 그해 10월 교황청으로부터 시복 조사 착수를 허락받았다. 수원교구는 이어 1997년 5월 강완숙 등 9위의 순교자를 추가 시복시성 대상자로 확정 발표해 모두 17위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에 박차를 가해왔다.
대구대교구는 지난해 4월 대교구 관내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순교록 제1집을 발간하면서 이를 토대로 타교구와 보조를 맞춰 시복시성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10월에는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가 교구와 관련된 순교자 23위의 시복 시성을 공식 선포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를 중심으로 신유박해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에 모든 역량을 결집하기로 하고 꾸준한 조사연구작업을 벌여 곧 신유박해 순교자 시복시성에 결정적 자료를 제공할 「한국 순교자 연구」 전 14권을 9월초 완간한다.
청원은 주교회의서
각 교구에서 시복시성 운동이 활기를 띠고 전개됨에 따라 청원 대상자가 중복되는 등 몇가지 어려운 점이 나타나자 한국교회는 지난해 주교회의에서 시복시성을 통합적으로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각 교구의 시복시성 추진 담당자들은 올해 1월말 처음으로 시복시성 통합 추진위원회를 갖고 매년 2차례의 정기모임을 갖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시복시성을 위한 자료 수집과 연구 작업은 최종 단계까지 각 교구에서 자체적으로 수행하되 최종적으로 교황청에 시복 시성을 청원하는 절차는 주교회의 사무처에서 통합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시복시성 대상자
지난 1985년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의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는 98명이다. 그 중에서 교황청에 청원서가 제출된 순교자는 전주교구 5명, 수원교구 17명 등 모두 22명이다. 전주교구의 청원자는 윤지충, 권상연, 유항검, 유중철, 이순이 등이고 수원교구의 청원자는 1차 청원자가 윤유일, 최인길, 지황, 윤유오, 윤운혜, 주문모, 윤점혜, 정광수 등 8명과 2차 청원자 강완숙, 조용삼, 최창주, 원경도, 이중배, 심아기, 정순매, 홍필주, 한덕운 등 9명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차기진 박사는 시복시성 대상자를 98명보다 적은 77명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1791년 진산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부터 을묘·정사박해(1797), 신유박해(1801),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에 이르기까지 기해박해(1839) 이전의 박해로 순교한 신자들 가운데 시복 대상자로 분류한 것이다.
시복시성 추진의 의미
한국교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순교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1만명 이상 순교자들의 피 위에 터를 닦은 것이 한국 천주교회로 순교 신심은 한국 고유의 독특한 신심이며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서구 어느 교회 못지 않은 103위의 한국 성인을 모시고 있는 한국교회가 또다시 순교성인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것은 결코 과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한시적 축제가 아닌 제삼천년기를 향한 새로운 복음화의 시작으로서 2000년 대희년을 맞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자부심이며 긍지인 순교 성인들의 정신과 믿음에서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진 순교 성인들, 특히 이미 시성의 영광을 얻은 103위 성인들의 선조이기도 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현양하는 작업을 통해 대희년과 새로운 천년기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 1801년 신유박해
주문모 신부 등 200여명 순교
1785년 이른바 명례방 사건으로 불리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시련은 누차에 걸친 크고 작은 박해의 시기를 거쳐 1801년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1801년 1월 10일 박해령을 내리기에 디른다.
권철신과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참수를 당하거나 유배되고 지도자를 잃은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3월 12일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해 4월 19일 순교함으로써 박해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주신부의 행적과 관련해 여러 신자들이 체포된다.
9월 29일에는 제천 배론에 은거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되고 백서가 발각됨으로써 더욱 큰 파란이 빚어진다. 백서의 내용을 근거로 조정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모반죄를 적용했다.
이후 박해는 12월 22일 대제학 이만수가 지어 반포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이 나와 마지막으로 처형이 이뤄지고 신유박해는 끝을 맺는다.
박해의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200여명의 순교자를 내고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들을 잃었다. 이로써 천주교 신앙은 하층민을 통해 전파되어 갔고 신자들은 피신해 교우촌을 형성하거나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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