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창간 72주년 기획으로 「신앙과 위기-나는 이렇게 극복했다」를 시작한다. 이 난은 세례 후 여러가지 이유로 신앙적인 갈등과 회의를 느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지켰는지에 대한 진솔하고 실제적인 체험담들로 꾸며질 예정이다. 바로 우리 곁에서 함께 생활하는 평범한 신자들이 직접 쓰는 이 고백은 신앙갈등을 겪고 있는 많은 신자들에게 큰 도움과 격려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희비가 엇갈리는 삶속에서 절망의 늪에 빠져 허덕일 때 자비하신 하느님의 구원 손길로 거듭 태어난지 10년이 흘렀다. 돌이켜보건대 그 10년은 정말 한량없이 감격스럽고 기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앙적인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을 대표해 국제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작곡가로, 편곡자로, 가수로, 지휘자로 유명세를 타며 의기양양하던 중 결혼 7년만에 가정이 파탄나고 아이 셋을 혼자 키우면서 상처 투성이 속에서도 허영과 방탕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서 스페인에 유학가 음악박사가 되보고자 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고등고시로 법관이 되려던 꿈도 이루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 죄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 주셨다. 89년 드디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예비신자 시절부터 음악봉사를해 주시는 등 나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자녀가 된 후에도 성체 찬미 경연대회 출연자 1273명을 취입하도록 일을 주셨고,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성체대회가를 재창해 주시며, 가톨릭 연예인라고 인정해주시기도 했다. 「제 탓이오」 운동으로 감사패도 받았고,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의 선처로 꽃동네에서 음악봉사도 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던 나에게 두 번의 유혹의 손길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미국 그레이스 교회(Grace Church)에서 지휘자로 초빙하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많은 보수와 명예를 주겠다는 제의와 함께. 두번째는 연예인 목사가 자기 교회가 운영하는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와 음악선교를 담당해 주길 요청했다.
고뇌에 빠졌다. 음악을 떼 놓고는 「나」의 존재이유를 찾을 수 없는 내게 이런 유혹은 그 어떤 것보다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왕 음악을 통해 선교할 생각이라면 저쪽(개신교)도 괜찮을꺼야」 「아니야. 하느님이 내게 이렇게 크나큰 은총을 주셨는데 이러면 안되지」 「아니냐. 하느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실거야」 「아니야. 내가 어떻게 영세를 받았는데」 「아니야. 개신교에 가면 나의 음악적 갈등을 풀 수 있을거야」 많은 번민의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런데 꽃동네에서 음악봉사를 하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점들이 나의 마음속에 뭉클뭉클 피어 올랐다. 꽃동네 식구들이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그들이 나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드려준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들의 생일잔치를 벌여주며 함께 웃고 즐거워 하던 시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러한 사랑앞에 명예도 돈도 필요없으며 가슴깊이 다져놓은 「사랑의 울타리」를 포기할 순 없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오히려 전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러 나왔다.
불교를 믿던 집안에서 돌연변이라 힐책하고 친구로부터 「예수쟁이」가 됐다는 소리가 이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은총 베푸심도 감사요, 숨쉬는 것, 먹고 마시는 것, 또 찬미할 수 있는 것도 감사요, 덤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심도 감사요, 용서하시고 덮어주시고 오히려 크신 은혜로 축복주심이 더욱 크시기에 감사,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이 한 몸 다 바쳐 주님을 흠숭하며 사는 마지막 날, 당신께 내미는 손 잡아주심을 굳게 믿으며 감사의 기도 바칩니다. 아멘.
[창간 72주년 특별기획-신앙과 위기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1) 찬미봉사단 「나자렛 사람들」장세용(베드로·57) 단장
많은 보수·명예…개신교서 유혹
갈등의 연속…
「꽃동네 가족 사랑」극복에 큰힘
발행일1999-04-04 [제2145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