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라질의 동북부 대표적인 빈민 지역인 레시페-올린다 대교구에서 평생을 살았던 카마라 대주교에 대해 「가난한 이들의 형제」라고 불러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간 그의 삶을 치하했다. 하지만 브라질의 독재자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비록 한번도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4번씩이나 노벨 평화상 후보자에 오르기도 했다. 카마라 대주교는 생전에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촉구했다. 1985년 은퇴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64년부터 1985년까지 이어진 군부 독재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여 싸워 왔다. 그의 강연과 강론에 대한 보도는 언제나 금지됐었고 그가 거주하던 집이 군인들의 집중 사격을 받기도 했다.
카마라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인으로 추켜세웠다』며 『그러나 내가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을 얻지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간이 흘러 공산주의는 정부가 말하듯이 괴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며 『공산주의는 너무나 약해서 하룻밤새 몰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진짜 괴물은 가난과 비참』이라며 『이 괴물들은 지금도 살아있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가 사망한 다음날, 레시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카마라 대주교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 프랑스 리오넬 조스팽 총리도 위로의 뜻을 전하고 『전세계는 위대한 휴머니스트이자 자유인을 잃었다』고 말했다.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수 브라질 대통령은 3일간의 국민 추모 기간을 공포했다. 대주교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레시페의 소박한 성당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들이 몰려 들었다. 그는 28일 밤 올린다의 다 세 성당에 안장됐다.
브라질 동북부 도시 포르타레자에서 태어난 카마라 대주교는 21세에 사제로 서품됐고 1952년 43세때 레시페-올린다 대교구장에 임명됐다. 바로 그해에 브라질 주교회의가 창설됐고 그는 초대 의장을 맡았다. 1962년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해 광범위한 개혁 작업에 참여했고 브라질의 거대 빈민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레시페-올린다 대교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 그는 75세 되던 1984년 사임서를 제출, 이듬해 교구장직에서 공식 사임했다.
세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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