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성인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 또는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 중의 한 분으로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독창적 방식으로 교회의 정통적 영성을 가르치고 생활하며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성(聖性)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다. 성인(聖人)으로 불린 이는 일부 소수의 특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주어진 각 생활 상태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중요한 교의는 그 후 약 400년 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히고 공식으로 천명하게 되는 진리(「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39~42항 참조)이다.
1. 생애
먼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탈리아의 국경에 접해있는 프랑스 동남쪽 사보아 지방에서 1567년 8월 21일에 명문가 드 살르(de Sales) 후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는데 특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모친은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인성 및 신앙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프란치스코는 지방의 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후 빠리에 유학하여 예수회가 운영하는 끌레르몽 대학에서 6년 동안 수사학, 철학 및 신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신앙의 일대 위기를 겪게 된다. 그것은 그가 당시 파급되어 있던 칼뱅의 운명 예정설에 사로잡혀 자신이 혹시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예정된 것이 아닐까 심히 번민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체험이다. 그 때 그는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상상에 빠져 들어가면서 크게 고뇌했던 것이다. 그는 이 고통스런 상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으나 벗어나기 어려웠고 점점 더 깊이 우울한 환상에 사로잡혀 나중엔 온갖 신심이 한낱 기만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성모님 상 앞에 꿇어 기도하던 중 종신토록 정결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겠다는 서약을 했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마음의 폭풍우가 홀연히 진정되고 감미로운 평화로 가득 채워지게 됨을 느꼈다. 이러한 어둔 밤의 체험은 훗날 그가 사목 활동 중 어두움 속에 헤매면서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며 도와주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빠리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그는 부친의 원의에 따라 유명한 법학부를 갖추고 있던 이탈리아의 빠도바 대학으로 옮겨가 법률 공부를 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법 뿐 아니라 또한 신학 공부에도 계속 열중하였다. 신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학문의 불충분함과 허전함을 보충하고 보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이 끌리던 사제 생활에 대한 성소를 그 때에 더욱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1592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샨 베리 시(市)의 원로원의 법률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부친의 주선으로 그는 원로원 의원직 취임 교섭까지 받았으나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가 걸어야 할 길과 수행해야 할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소망을 채워주지 않아 실망스러워 하던 부친에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허락해 주길 간곡히 청하여 결국 부친을 설득하였고 이로써 그에게 사제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1593년 12월에 프란치스코는 사제 성품을 받고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봉사하였다. 교구의 장상이 샤블레의 칼뱅파 교도들을 다시 성교회로 귀의시키기 위해 선교활동 할 사제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그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그는 많은 위험과 곤경 중에도 굴복하지 않고 칼뱅주의자들의 귀의를 위해 온갖 정성과 방법들(동기는 선의였으나 비판받을만한 방법들도 활용했음을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임)을 동원하여 투신하였으며 결국 7만이 넘는 사람들을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1602년에 즈네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장으로서 그리고 사목자로서 교구쇄신을 위한 폐습의 교정과 조직 개편,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여건 조성과 장려, 쇄신적 사제양성을 위한 배려, 수도생활 쇄신을 위한 독려, 영적 서적들의 저술, 영적 지도 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교구 내 산재해 있는 벽촌들을 끊임없이 순회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하며 고해성사 집전과 교리교육 등 헌신적인 사목 봉사를 하였다. 그는 또한 자주 사제들을 두루 방문하여 그들과 친교를 이루고 그들이 사도직에 더욱 충실하며 기쁨에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단으로 황폐해졌던 그의 교구가 얼마 후엔 프랑스에서 가장 열심하고 모범적인 교구가 되었다.
1607년엔 성녀 요한나 샹딸과 함께 성모 방문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 수도회는 봉쇄 공동체였는데, 심한 육체적 고행을 회칙으로 명하던 종전의 수도회들과 달리, 신체적으로 연약한 여인들도 입회할 수 있도록 수덕 행위를 덜 엄격하게 조절 완화하였다. 완덕에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은 육체적 고행보다 정신적 희생 즉 자신의 뜻을 떠나며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르고 일치하는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견해를 따랐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주교는 1618년 11월부터 다음 해 9월까지 빠리에 용무가 있어 머물게 되었는데 시민들은 이 유명한 대 강론가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매일 성당에 운집하였고 그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면서,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빠리에 상주하기를 간청하였다. 그가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가장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은 자선사업의 사도이며 프랑스 성직자들의 쇄신 활동가로 유명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친교를 맺은 것이다. 그는 빠리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의 영적 지도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에게 부탁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영성은 그의 저작 총 27권 안에 풍성히 담겨있으나 특히 신심생활 입문과 신애론(神愛論) 그리고 영적 담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12권에는 영적 지도를 위해 그가 썼던 2100여 통의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과학, 예술 및 프랑스어의 연구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안느시에 플로리몬타느 아카데미를 세웠는데 그것은 프랑스 아카데미가 태어나기 30년 전 일이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1622년 겨울에 리옹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는데 갑자기 뇌일혈로 인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가 그의 나이 56세이던 1622년 12월 27일이었다. 그의 유해는 안느시의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1665년에 교황 알렉산더 7세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시성을 통하여 성인품에 올렸으며, 1877년에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교회의 박사」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비오 11세는 그의 문학적 능력과 공헌을 높이 기리며 그를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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