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4호선이 끝닿는 상계동, 예로 무당이 많아 당고개라 이름 붙여진 당고개역에서 내려 또 한참을 걸어 들어가 산기슭을 오르다보면 재개발이 한창인 아파트 단지 사이로 몇 안되는 낮은 집들이 나타난다. 퇴락할 대로 퇴락해 도드라져 보이기까지 하는 이 낮은 집들 사이에 배선진(요안나.12)양이 할머니와 단둘이 세들어 살고 있다.
6평 남짓한 한 칸짜리 방은 여느 초등학교 6학년생의 방과 다름없이 아기자기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빈곤한 삶의 티를 내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이 엿보이는 듯했다. 여러 사람의 손을 탄 듯한 동화책과 장난감에서는 친근함이 묻어났다.
올해로 일흔여섯을 맞은 할머니 박양순(아나다시아)씨는 말이 거의 없는 선진이를 토닥여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묻는 사람이 미안할 정도로 빈곤하다. 무엇이 어린 선진이에게서 말을 빼앗아 가버렸을까. 10년전 핏덩이인 선진이를 놔두고 가출한 엄마, 그 엄마를 잊지 못하고 찾으러 나갔다가 4년째 소식이 끊긴 아빠…. 태어나 여태껏 가족 나들이 한번 해본 적이 없다는 선진이는 그가 엄마로 부르는 대모 송혜경(수산나)씨네 가족과 갔던 나들이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는다고 한다. 이 말을 수줍은 얼굴로 하던 선진이에게선 마냥 눈물이 넘쳤다. 언제 세상을 뜰 지 모르는 할머니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방과 후에는 물론 방학 때도 집에서 벗어나 보질 않았다는 선진이는 그러나 생각 외로 밝은 아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은 편이라고.
TV 방송작가가 꿈이라는 선진이는 어떻게 재능을 닦았는지 단소 등의 악기연주도 제법이고 글짓기에서도 소질을 보여 이미 교내외의 상을 휩쓸기도 했다. 과외 한번 해보지 않은 선진이로서는 눈물나는 숨은 노력이 없고는 안될 일이다.
매달 구청 취로사업을 통해 할머니가 벌어들이는 20만원 안팎의 수입에다 성당에서 보조해주는 10만원 정도가 고정 수입인 선진이네는 그러나 이 수입 중 반 이상을 꼬박 할머니 약값으로 지출해야 하는 처지. 할머니가 30대부터 앓아온 천식이 근래 들어 심해져 약이 아니고서는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얼마전부터 선진이를 컴퓨터학원에 보내고 있다. 자신이 살아있을 때나마 손녀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자는 뜻에서다. 소식없는 아빠 때문에 생활보호 대상자 혜택도 못받는 상황에서 할머니의 손녀에 대한 사랑은 부모의 사랑마저 합친 듯했다.
"내가 죽고 나거들랑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며 네 스스로 살아갈 줄 알아라"는 할머니의 말을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어깨를 주무르는 선진이에게서는 의연함이 내비쳤다.
※도움주실 분=(02)937-0708,
서울시 노원구 상계4동 71-34 27/1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