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끝자락!
천리길을 버스로 달려와 또 다시 산길 십여리를 헤치고 들어와 자리잡은 곳.
지도상으론 바다가 지척일 듯한 전남 순천시 낙안면 화목부락은 그렇게 사방 산으로 싸여 객을 맞는다.
입하와 망종을 지나 여름의 문턱을 넘어왔음에도 서늘함이 감도는 해발 300미터 산촌에는 이미 모내기, 논둑베기 등 대충의 농사일손이 한굽이를 넘고 있었다.
논과 밭을 오르는 산길 곳곳에 산딸기와 머위 등 도회지에서는 돈으로 구해야만 되는 산물이 지천으로 널린 화목부락에는 풍성한 자연만큼이나 마음 넉넉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름하여「화목공동체」사람들.
93년 10월 처음 이곳을 찾아든 한옥현(하상바오로ㆍ45)씨를 시작으로 꾸려지기 시작한「화목공동체」는 이름 그대로 일치를 이루어 가는 가운데 정겨움이 물씬 묻어나는 공동체다.
혈혈단신 화목부락을 찾은 한씨가 빚으로 마련한 1,000평의 논과 500평의 밭이 오늘의 화목공동체의 밑거름이 됐다.
농촌을 하나 둘 떠나는 이농현상은 화목부락에도 일찌감치 불어닥치기 시작해 한씨가 처음 이곳을 찾던 해에도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랬기에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한씨가 의아스럽기만 했다. 여수라는 도회지를 버리고 농사를 짓겠다고 홀로 찾아든 한씨의 깊은 뜻을 마을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고구마, 들깨, 참깨 등으로 시작한 한씨의 농사도 화목부락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짓으로 비춰지기 일쑤였다. 일손이 턱없이 모자라는 판에 농약 뿌릴 생각은 않고 자신들도 오래전에 손놓아 버린 퇴비 만들기 등 옛날 방식의 농사짓기를 고집하는 한씨의 농사가 한심스럽기 그지 없었던 것이다.
한씨가 첫발을 디뎠을 때 50여가구에 이르던 화목부락이 12가구로 줄어들기까지 한씨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계속 저질러댔다. 혼자서 짓던 농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한 한씨는 95년 여수에 머무르고 있던 부인 김백자(정혜 엘리사벳ㆍ45)씨와 아들 재식(15ㆍ낙안중 2년)이마저 산골로 불러들였다.
이들 가족의 뒤를 따라 박우근(대건 안드레아)씨도 화목부락을 찾아들었다. 한씨가 뿌려둔 화목공동체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이렇게 한씨를 중심으로 하나 둘 모이게 된 세 가구의 가톨릭인들이 공동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95년 초.
이들도 예의 한씨가 저지르던(?) 기막힌 일을 조직적으로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여느 농촌, 여느 농사꾼의 삶과는 완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삶이 시작된 것을 이들외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비료 한포대면 족할 일을 위해 이들은 몇 달을 수고해 퇴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료로 길이 든 땅이 한마지기당5~6가마니의 소출을 보장해주는 반면 이들의 농사는 당장 두가마니안팎의 수확만을 거둘 수 있게 해줬다. 이렇게 최소한 5~6년은 피땀을 흘려야 땅은 제 힘을 찾기 시작해 옛맛을 지닌 쌀을 내놓게 된다.
『애초부터 길이 있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 지나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씨를 비롯한 화목공동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는 길이 산길을 넘는 조그만 소로의 역할이라도 다할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박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
가톨릭농민회 일을 목숨처럼 여겨오던 이들이 농촌을 찾게 된 것은 생명운동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었다.
『농촌을 살리는 일은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을 살리는 일이며 이 길이 곧 사람이 하느님 뜻대로 사는 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자신들이 어렵사리 벌이고 있는 유기농을 통한 생명운동을 하느님이 주신 땅 속의 보물, 만나를 캐는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화목공동체의 뜻은 불어난 공동체의 규모로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4,500여평으로 늘어난 전답과 3,000평에 이르는 비닐하우스, 6,000여평의 방목장에 뛰노는 120여 마리의 토종돼지가 이들이 가꾸어 가고 있는 소중한 꿈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런 화목공동체의 삶은 알음알음 알려져 이제 매년 500여명이 방문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6월 6~7일 화목공동체는 서울서 먼길을 달려온 한무리의 사람들과의 의미있는 만남을 가졌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내「명례방협동조합(이사장=한효)」조합원 가족 40여명이 그들. 명례방 협동조합은 화목공동체에 출자하고 있는 자매단체라 할 수 있다.
명례방 협동조합과 같이 화목공동체의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의 투자가 늘어 지난해 11월 공동체는 의미있는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토착 미생물 발효기계」의 시운전이 그 것. 4억여원이라는 돈이 들어간 이 기계는 인근 도시를 순회하며 모아온 음식물 찌꺼기를 재활용해 가축 등의 사료로 만드는 기계다. 이 기계의 설치로 화목공동체의 유기농을 통한 생명운동은 큰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조합원들을 떠나보내는 화목공동체 식구들은 이 말을 잊지 않았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여러분을 맞아들일 준비가 돼있습니다. 꿈을 한사람이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여럿이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한씨집 옆에서 부지런히 터를 닦고 있던 굴삭기와 경운기가 미래의 화목공동체 식구를 맞을 준비를 이미 마쳐 놓았을지도 모른다.
[르포] 「도시」버리고 「농촌」택한 「화목 공동체」(전남 순천시 낙안면)
“농촌 살리는 일은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을 살리는 일”
농약 일절 사용않고 퇴비로만 농사 고집 매년 500여명 방문…언제든지“환영”
발행일1998-07-12 [제2110호, 13면]

▲ 처음 화목부락을 찾은 한옥현씨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