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품을 받은 그 이듬해인 1940년 한국 땅을 밟은 26세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호주인 신부가 있었다. 필립보 크로스비(한국명:조선희) 신부. 그는 84세의 나이로 본국에 돌아갈 때까지 약 58년간 춘천교구 사제로 살았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연금을 당하거나 3년간 생사를 넘나드는 포로 수용소를 전전하며 억류당했다. 모두 한국전쟁 때문에 겪은 고통이었다.
조신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체포되어 3년간의 포로 생활을 겪었는데, 당시의 삶을 수기 형태로 남겨두었다. 이 책은 그의 포로 수기를 번역한 것으로, 지난 1955년 아일랜드에서 출간돼 거의 50년 동안 묻혀 있다가 마침내 우리말로 번역되어 빛을 보게 됐다.
그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회고록이나 수기가 대체로 전쟁의 경과와 양상을 시간에 따라 기술하거나 특정 전투 및 저자의 활약상을 기록한 것에 치우쳐 있었다면, 이 책은 벽안의 선교 사제가 온몸으로 겪은 생생한 전쟁 체험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단연 눈길을 끈다.
책에는 당시의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혹독한 아픔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간수들의 잔인함과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는 굶주림, 의약품이 전혀 없는 상황, 죽음의 행진에 이르기까지 포로들이 겪었던 온갖 고통을 50여명의 다양한 민간인 포로 그룹과 주변인들의 삶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특별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죽어 가는 죽음의 행진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고통의 신비를 깨달아 가는 선교 사제의 삶」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체포한 사람들과 간수들까지도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날에는 아무도 그분을 뵙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조신부의 모습은 순교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장면이다.
이밖에도 책은 초대 춘천교구장이었던 퀸란(한국명:구인란) 신부의 모습을 비롯해 골롬반선교회와 파리외방전교회 등 전쟁과 함께 체포된 선교사들이 동토의 땅에서 생존을 위해 겪었던 마음가짐과 자세를 사실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래서 깊은 감동을 준다.
한편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서문에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포로생활을 담담하게 술회하면서도 한결같이 사제다운 온유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간직한 신부님의 글은 더욱 깊은 존경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허종렬 옮김/가톨릭출판사/370쪽/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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