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뚫렸다. 반도의 동,서쪽끝에서는 하루에도 수백개의 지뢰가 제거되고, 경의선 열차는 실향민을 싣고 북쪽 끝 도라산역을 매일 왕복한다. 동해항에서는 수백명의 관광객을 태운 금강산 행 유람선이 뱃머리를 북으로 돌리고 항구를 나선다. 피부에 가까이 다가선 통일의 느낌.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희망이 있기에 도로가 뚫리고 철로가 열릴 때마다 온 국민의 마음은 벅차다.
하지만 더 가슴 벅찬 이들은 「올해는 갈 수 있겠지」라고 되내이며 긴 세월을 지내온 실향민들일 것이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쳐 희망의 불씨조차 희미하게 남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통일의 분위기는 이들에게는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새해에는 정말 그 바람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실향민들의 모습에서 밝아오는 계미년의 희망을 찾아봤다.
눈내리는 미시령을 힘겹게 넘어 다다른 속초. 육지의 끝자락 바닷가에 속칭 「아바이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인 이곳은 뭍으로는 조양동과 연결돼 있고, 동해와 청초호를 가르며 해안을 따라 폭 200여 미터, 길이 1800여 미터의 모래 위에 건설돼 있다. 전시에는 경비행기 이착륙장으로 쓰일 만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곳에 실향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실향민 1세대만 500여명. 대부분 1.4후퇴 때 군함으로 혹은 나룻배로 내려온 이들은 이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사흘이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50여 년이 흘렀고, 고향에 가지 못하고 숨을 거둔 실향민들은 미시령 아래 실향민 묘지에 묻혔다. 이곳에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이유는 단 하나. 고향과 가깝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인 이들은 국군을 따라 울산, 포항 근처까지 함께 내려갔다가 이곳까지 올라왔다. 전쟁이 끝나고 북으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정착하게 됐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내려온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알려져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아바이마을은 아직도 개발이 안된 속초의 오지다. 빛 바래 쓰러질 듯 한 나무 전봇대가 줄지어 서 있고 50여년 전 지어진 판자집은 버려진 채 남아있다. 더욱 을씨년스러운 것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실향민 1세대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고 실향민 2, 3세대는 이미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불빛 하나 없이 파도소리만 요란한 아바이 마을의 모습이 청초호 건너편 속초시내의 휘황한 불빛과 대비된다.
박순옥(임마누엘라?54?춘천교구 속초 청호동본당)씨는 아바이마을의 몇 안되는 실향민 2세대다.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인 박씨는 2살 때 부모를 따라 이곳에 내려왔다.
생전에 박씨의 부모는 시간이 날 때마다 박씨를 붙들고 고향 이야기를 해줬다고 한다. 박씨는 펜과 종이만 있으면 흥남부두와 고향집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라고 자부한다. 실향민 2세대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실향민 1세대와 다름이 없다.
함경도 음식인 명태?가자미식혜를 팔고 있는 박씨는 그나마 고향음식을 만든다는 기쁨이 있어 즐겁다. 할머니가 만드는 방법을 손수 가르쳐 준 식혜는 고향 맛과 똑같다고 소문이 퍼져 전국 곳곳 실향민들의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박씨의 희망 하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분단의 상징이 아니라, 통일이 돼 달려간 흥남 부두에서 갓 잡아 올린 가자미로 식혜를 만들어 고향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남쪽에 있던 사람들이 망향의 한을 음식으로밖에 풀지 못했다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 소망이 식혜에 담겨 실향민들의 가슴을 달래고 있다.
"살아있을까?"
교우 집임을 알려주는 십자가를 보고 들른 집에서 김연옥(안나?75) 할머니가 되물었다.
『북에 두고 온 남동생들이 이제 일흔 둘, 예순 일곱이야. 배고파서 애들도 다 죽는다는데 동생들이 과연 살아있을까』
함경남도 신포가 고향인 김연옥 할머니는 23살이던 1951년, 1.4후퇴 때 남편과 함께 남으로 내려왔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배를 다룰 줄 알았던 남편은 피난민들의 독촉으로 남쪽행을 택했다. 사흘이면 다시 돌아온다는 남편의 말에 나선 길. 모래사장에 오두막을 짓고 돌아갈 날을 기다렸지만 끊임없이 피난민들만 내려올 뿐이었다. 뒤늦게 내려온 고향사람들은 동생이 북에서 노역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줘 더욱 안타깝게 했다. 동생 한 명은 인민군으로 끌려갔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집을 나간 남편은 속초 시내에서 따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더라도 아들만은 고향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나뿐인 아들도 외지를 떠돌며 일을 하다가 병들어 결국 이곳으로 돌아와 사흘만에 세상을 떴다. 그렇게 홀로 지낸 지 20여 년. 할머니의 방안에는 지나온 세월 만큼의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 할머니는 한 달에 20∼25만원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다리가 좋지 않아 보일러에 연탄 갈아넣기도 버거운 할머니지만 주일미사는 꼬박꼬박 참례한다. 걸어서 2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 집에 있는 동안에도 내내 묵주를 손에 쥐고 있던 할머니가 성당에 가기 위해 나선다.
『묵주를 세개씩 들고 다녀. 건망증이 심해져서 묵주를 자꾸 잊어버리니까 주머니에 여분을 갖고 다니는 거지』
『하루종일 무슨 기도를 그렇게 드리세요?』라는 물음에 할머니는 『산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남에도 살아있고 북에도 살아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고 답한다.
『내가 아까 물었잖아. 동생들이 살아있을지 모르겠다고. 그저 이렇게 기도하면서 살아있길 고대하고 또 고대하는거야. 결국 이런 기다림으로 50년을 보냈지만 아직도 살아있다면 꼭 가서 만나야지. 죽더라도 거기서 죽고 싶어』
첩첩 높이 솟은 산봉우리 앞을 가리고 구비구비 험한 길 아득히 멀어도 어머니와 어린 아들은 오손도손 망향의 이야기 나누며 북녘고향 땅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 비바람 눈보라 휘몰아치고 어느 짖궂은 길손이 그 앞길 가로막는다 한들 두 생명 다하도록 낮도 밤도 없이 가야만 하느니』(수복기념탑의 모자상부 첫 구절)
속초시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수복기념탑. 보따리를 끼고 있는 어머니와 북녘하늘을 가리키는 어린 아들이 함께 손을 잡고 고향 땅을 바라보는 애절한 동상은 더 이상 고향 땅으로 올라갈 수 없는 실향민의 한과 통일의 염원을 대변하고 있다.
아들의 손가락 끝에 아바이마을이 걸쳐 있다. 김연옥 할머니를 비롯한 이곳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희망이 차가운 동상의 손가락에서 머물지 않고 저너머 고향까지 다다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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