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봄. 동화작가 정채봉(프란치스코·1946~2001) 선생이 서울 명동성당의 김수환 추기경 집무실을 찾았다. 어린이 신문에 김 추기경의 성장기를 연재함에 앞서 승낙을 받기 위한 자리였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김 추기경은 ‘어린이들의 미래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빛의 씨앗을 뿌리려 한다’는 정 선생의 설득에 이끌려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정채봉 선생은 김 추기경과 함께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군위 등지를 찾았다. 이후에도 그는 수시로 추기경 집무실을 찾아 취재를 이어나갔다. 정채봉 선생이 최초로 쓴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는 그해 5월 1일부터 8월 7일까지 소년한국일보에 ‘저 산 너머’라는 제목으로 78회에 걸쳐 연재됐다.
그리고 2009년 봄. 당시의 연재 원고가 「바보 별님」(정채봉/솔 출판사/192쪽/9500원)이란 제목으로 묶여져 나왔다. 책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무려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두 주인공은 차례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김 추기경과 정 선생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책이 출간된 데에는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었다. 약 3개월간의 연재를 마친 정 선생은 바로 책으로 펴내고 싶었지만, 김 추기경은 “작품이 참 예쁘고 순수해 매일같이 읽었어요. 우리 사회의 지도적 인물도, 위인도 아닌 이 ‘바보’가 너무 잘 그려져 쑥스럽습니다. 지금은 남 보기 민망하고 부끄러우니 나 가고 난 뒤에 책으로 내더라도 내면 좋겠어요”라며 극구 만류했다.
김 추기경의 뜻에 따라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지만, 정 선생은 지난 2001년 추기경보다 먼저 지상에서의 여정을 마감했다. 이후 김 추기경이 선종하자 원고를 보관해 온 선생의 미망인 김순희 여사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책을 출간하게 됐다.
김 여사는 “남편은 ‘샘터’사에 근무할 당시 김수환 추기경님과 몇 차례 인연을 맺었고, 평소에도 추기경님을 깊이 흠모해 왔다”며 “남편이 추기경님보다 먼저 타계하는 바람에 남편 손으로 직접 책을 출간하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1부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 추기경의 할아버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추기경이 군위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의 이야기를 3인칭 시점으로 풀어나간다. 보따리상을 하던 어머니가 안쓰러워 가게 주인이 되고자 했고,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주권을 찾고 싶다”고 답하던 꼬마 김수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정채봉 선생 특유의 맑고 애잔한 정서가 묻어나는 동화적 성격이 짙다.
2부는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부터 추기경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김 추기경의 구술을 바탕으로 담은 회고록이다. 나라 잃은 민족의 젊은이로서 정치가의 길을 꿈꾸던 이야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죽음의 위기 직전에 본 어머니의 환상, 가톨릭신문사(당시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만난 사형수 최월갑씨와의 인연 등이 소개돼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연재물이었지만 당시 김 추기경의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기록적인 가치도 크다.
정채봉 선생은 연재를 시작하며 쓴 글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감히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분이 걸어오신 길을 글로 따르다 보면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용기의 씨앗, 희망의 씨앗, 정의의 씨앗, 그리고 빛의 씨앗을 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고 적었다.
※문의 02-332-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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